<본문>
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
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오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 환상을 보여주신 것에 대한 것입니다. 선지자가 환상으로 본 무화과 광주리 하나에는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고 다른 하나에는 먹을 수도 없는 아주 나쁜 무화과가 담겨 있습니다.
각기 상태가 다른 무화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5절과 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서 생활하게 된 사람들을 나쁜 무화과로 말합니다.
이처럼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에 대한 말씀에서 먼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침략에 의해 유다가 망했을 때 포로로 끌려간 사람보다는 그나마 유다 땅에 남아서 생활하게 된 사람들이 더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나쁜 무화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바벨론으로 끌려가 노예로 생활하는 것보다는 유다 땅에 남아 있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보다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구분합니다. 어쨌든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나은 형편과 상황이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깁니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했기 때문에 사고가 나도 다치지 않거나 가벼운 부상만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상황을 신앙에 맞추어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런 방법으로 지키시고 도우시며 그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라면 아예 사고가 없도록 막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건강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잊기 때문에 이런 저런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은혜를 깨닫게 하신다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아픔과 고통의 일로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작은 아픔보다는 큰 아픔이 더 깊이 하나님께 마음을 둘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유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가벼운 아픔과 고통에 대해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고 단지 자신이 더 나쁜 상황으로 빠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 땅에 남겨진 사람들보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좋은 무화과로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돌보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합니다. 때문에 환경의 좋고 나쁨의 여부를 하나님이 돕고 돕지 않으심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그 뜻은 우리를 좋은 환경과 형편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은혜 또한 좋고 나쁜 환경의 여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 안에 존재하는 신자에게는 사실 좋은 환경, 나쁜 환경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좋은 환경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좋은 환경, 나쁜 환경을 선택하여 채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 자신이 처한 자리에 머물며 살아갈 뿐입니다. 나쁜 환경이 싫어서 그 환경을 바꾸려는 의도로 기도한다고 해도 모두 헛된 일일 뿐입니다.
애당초 아픔과 고통의 상황으로 밀어 넣으신 하나님의 뜻은 단지 고생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과 인간의 현실을 깨닫게 하셔서 그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자 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것을 좋은 무화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 영광을 추구하며 삽니다. 유다가 우상을 버리지 못한 이유 역시 자기 영광을 향한 집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다를 흔드심으로써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게 하고자 하신 것이고, 그것이 유다 멸망과 포로라는 아픔과 고통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물론 포로로 끌려간 환경 자체가 그들을 좋은 무화과로 일컬음 받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7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포로로 끌려간 자들에게 유다를 망하게 하시고 자신들을 포로 되게 하신 분이 여호와임을 아는 마음을 주셔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온 그들이 좋은 무화과인 것입니다.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포로 된 자신들의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 마음을 두지 않고 이방 나라처럼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온 죄를 깨달으며 포로된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당연한 조치임을 받아들이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픔과 고통의 길로 인도 받을 때 생각할 것이 바로 지금의 이 처지가 나에게 당연함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럴 때 지금 주어진 것이 부당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좋은 환경에 뜻을 두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시기를 거부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 간 사람들은 고통의 세월을 견뎌야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고 조롱과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9,10절).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과 그 길의 끝은 같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자신의 불의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아는 자로 사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주어진 어떤 자리에서도 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진심으로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신자입니다.
신자는 어떤 처지에서든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십니다. 비록 지금 아픔과 고통이 있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함을 생각한다면 지금 주어진 것이 어떤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