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16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냈기 때문이니라 하시기로
17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
18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고관들로 마시게 하였더니 그들이 멸망과 놀램과 비웃음과 저주를 당함이 오늘과 같으니라
19 또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모든 백성과
20 모든 섞여 사는 민족들과 우스 땅의 모든 왕과 블레셋 사람의 땅 모든 왕과 아스글론과 가사와 에그론과 아스돗의 나머지 사람들과
21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22 두로의 모든 왕과 시돈의 모든 왕과 바다 건너쪽 섬의 왕들과
23 드단과 데마와 부스와 살쩍을 깎은 모든 자와
24 아라비아의 모든 왕과 광야에서 섞여 사는 민족들의 모든 왕과
25 시므리의 모든 왕과 엘람의 모든 왕과 메대의 모든 왕과
26 북쪽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니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
27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내가 너희 가운데 보내는 칼 앞에서 마시며 취하여 토하고 엎드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라 하셨느니라
28 그들이 만일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마셔야 하리라
29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서울의 모 대형교회가 이천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지금도 시골 어느 곳에서는 허름하고 조그마한 작은 예배당에서 교인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고, 교회들마다 교인수와 재정 능력이 다릅니다.
각자 개개인의 형편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삶의 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형편에 따라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보다는 더 나은 질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힘을 쓰며 삽니다.
이러한 삶에 굳이 시비를 걸 뜻은 없습니다. 사실 저라고 해서 좀 더 나은 삶을 원하는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지고, 그 뜻의 결국은 멸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1서 2:17절에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잠시 동안 있다가 사라질 것들일 뿐입니다.
세상을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소유에 뜻을 두게 될 것이고, 결국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로 나누면서 자신보다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더 큰 복을 누리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다만 나를 복 주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진노의 술잔을 주시고 모든 나라에 보내어 마시게 하십니다. 진노의 술잔을 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7-26절에 진노의 술잔을 받는 나라로 유다를 위시해서 수많은 나라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나라들을 보면 종교를 초월했고 경제적 능력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든 믿지 않는 이방 나라든 진노의 술잔을 받았고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상관없이 진노의 술잔을 받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멸망으로 향해 달려가는 것이 세상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진노의 술잔을 마신 모든 나라가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 중에 칼을 보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칼은 전쟁을 상징하며 전쟁에서 살아남는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실제적인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쟁을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누르고 이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현실을 빗대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술잔을 받아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하는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합니다. 기독교인도 기독교인이 아닌 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로지 세상만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잊어버린 채 다른 누군가에게 지니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살아갑니다. 또한 술에 취한 것처럼 세상에 취해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 거립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신자는 모든 나라에게 진노의 술잔을 주셨다는 말씀에서 세상의 결국이 어떠한가에 대해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결국에 대해 눈을 감고 바라보면 보이는 것은 세상의 부와 영광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저들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이 힘을 얻으면서 세상의 경쟁에 뛰어 들어 함께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하게 됩니다.
세상은 미쳐 있습니다. 돈에 미쳐 있고 성공에 미쳐 있습니다.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한 달에 몇 백만 원을 사교육비로 지출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정성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렇게 미친 듯이 정성을 쏟아 부은 결과가 무엇일까요? 자식으로 인해 부모가 만족할 수 있을까요? 만족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족이라는 욕망에 붙들려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 취해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는 끝이 있고 그 때는 속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비록 더디다고 생각될지라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반드시 그 때가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 즉 종말이 이르고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을 향해 그대로 시행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평소에 부러워했던 것, 소중히 여기고 가치 있는 것으로 귀하게 여겼던 것들이 어떻게 될까요?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종말이 있으니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려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말에 서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부러워하고 낙심하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의 때가 되면 드러날 진심으로 가치 있는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노아와 그 시대의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을 바라본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심판을 무시한 것에 있습니다. 노아는 말씀을 믿고 장차 임할 심판을 반드시 이루어질 현실로 여겼기에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술잔을 받았음을 알기에, 그래서 비틀거리고 미친 듯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뜻을 두는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재앙은 예루살렘 성에서부터 시작되어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친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성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제사 행위도 재앙을 막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재앙은 우리의 어떤 종교적 행동이나 선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길은 다만 예수님께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재앙에서 건지실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가장 잘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기에 세상의 것은 주어진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소유가 적은 자신으로 인해 실망하지 않습니다. 가장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