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02.24 10:21

(66강) 뜻을 돌이키리라

조회 수 395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렘 261-9http://onlycross.net/videos/jer/jer-26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4 너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며

5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6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7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8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9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


 

 

<설교>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나와서 예배하는 자들을 향하여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6절)고 말씀합니다.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신다는 것은 삼상 4장을 배경으로 한 말입니다.

 

 

삼상 4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되고 실로는 황폐하게 됩니다. 그처럼 성전이 무너져서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말은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로 감하지 말고 전하라고 합니다. 선지자에게 이러한 말을 듣게 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유다 사람들이 제사를 게을리 하고 제물을 바치지 않는 현장에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 같은 말을 한다면 설사 듣기 싫은 말이라고 해도 반박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사를 게을리 했다는 자신들의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현장에서 이 같은 말을 듣는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성전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신앙행위입니다. 따라서 그들 생각에 자신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신앙 역시 바르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성전을 무너뜨린다는 선지자의 말을 결코 곱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선지자를 붙잡고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고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말합니다.

 

 

이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한 엉터리 말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악하다고 하시는데 정작 그들은 자신들의 악함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유다가 악행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또한 배척하면서 선지자를 죽이려고 할 것임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계속 선지자를 세워서 말씀을 전합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고 말합니다. 과연 유다가 이 말대로 행했습니까? 그랬다면 그들이 바벨론에게 망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는 것은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악한 길로 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돌이키지 않음으로 결국 재앙을 내려야 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오리라’‘뜻을 돌이키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언젠가는 유다가 돌아 올 것이라는 기대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스스로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는 인간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시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의 정성과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보고자 하는 것은 큰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열심을 보이면 뜻을 돌이키셔서 고통에서 건져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 됩니다.

 

 

유다 백성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자신들이야 말로 심판과는 상관없는 존재임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고 재앙에 대한 선포를 감하지 말고 하라고 하심으로 유다 또한 이방인과 동일하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 대상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어떤 신앙행위를 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선지자를 통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뭔가 행하고 실천하는 자신을 바라보기를 좋아합니다. 기도 하면 기도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도 그런 자신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제멋대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십일조 하는 신자를 기뻐하시고 상을 주신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악한 자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도 결국 악한 자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늘 우리에게 함께 하면서 이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너는 악한 자야 문제 있는 자야’라는 말을 쉴 새 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봉사하는 나를 향해서도 악한 자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를 죄의식에 빠지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의식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로부터의 자유를 알게 하기 위해 우리의 악함을 선포합니다. 이유는 내가 악한 자임을 알 때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에게 마음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자를 알게 됨으로 인해 자기를 바라보며 쓸데없는 죄의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고 분노하는 것은 예배하는 자신을 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을 바르게 보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자신을 바르게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이 뜻에서 벗어나 있는 문제 있는 자기 실체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을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을 저주가 마땅한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효과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공로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인간이 공로라고 여기는 모든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주님의 공로이고 은혜일뿐이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난다면 그 현장에서는 인간의 악함이 드러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만 증거 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88 예레미야 (68강) 줄과 멍에를 메고 신윤식 2013.03.10 4127
387 예레미야 (67강) 미가와 우리야 신윤식 2013.03.03 4177
» 예레미야 (66강) 뜻을 돌이키리라 신윤식 2013.02.24 3953
385 예레미야 (65강) 목자를 향한 진노 신윤식 2013.02.17 3884
384 예레미야 (64강) 진노의 술잔 신윤식 2013.02.10 4006
383 예레미야 (63강) 칠십 년 포로생활 신윤식 2013.02.03 4187
382 예레미야 (62강) 무화과 두 광주리 신윤식 2013.01.27 4030
381 예레미야 (61강) 엄중한 말씀 신윤식 2013.01.20 4274
380 예레미야 (60강) 도둑질 하는 선지자 신윤식 2013.01.13 3841
379 예레미야 (59강) 듣지 말아야 할 말 신윤식 2013.01.06 3832
378 예레미야 (58강) 선지자가 선지자에게 신윤식 2012.12.30 3890
377 예레미야 (57강) 정의와 공의의 왕 신윤식 2012.12.23 4143
376 예레미야 (56강) 습관적인 죄 신윤식 2012.12.16 3993
375 예레미야 (55강)여호야김의 잘못 신윤식 2012.12.09 4017
374 예레미야 (54강) 패망의 이유 신윤식 2012.12.02 3881
373 예레미야 (53강) 두 길 신윤식 2012.11.25 4083
372 예레미야 (52강) 하나님의 권유 신윤식 2012.11.11 4270
371 예레미야 (51강) 예레미야와 바스훌 신윤식 2012.11.04 4666
370 예레미야 (50강) 목이 곧은 이스라엘 신윤식 2012.10.21 4191
369 예레미야 (49강) 예레미야를 치자 신윤식 2012.10.14 3790
Board Pagination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