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0 유다의 고관들이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으매
1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
12 예레미야가 모든 고관과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가 들은 바 모든 말로 이 성전과 이 성을 향하여 예언하게 하셨느니라
13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14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15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
16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느니라
17 그러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8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19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20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21 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22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냈더니
23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
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설교>
선지자 예레미야의 선포를 접한 제사장, 선지자, 백성들은 하나같이 예레미야를 붙들고 ‘네가 죽어야 한다’고 위협을 합니다. 10절에 보면 유다의 고관들도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사장과 선지자는 모여든 백성과 고관들에게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11절)고 선동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레미야는 자신의 안위를 전혀 돌보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면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도 그가 처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상대방을 자극할 말은 삼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자신이 처한 상황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유다를 향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마치 두려운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레미야가 배짱이 있고 강심장이어서 그럴까요? 이것은 배짱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한다면 먼저 그에게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함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죄의 길에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외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죄가 보일 때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결국 심판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회개를 촉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13절)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결국 그런 마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을 소망하는 신자로써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하기를 멈추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깊은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나의 안위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더 소중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길만을 가고자 하는 그런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에 대해 자신만만한 말을 하다가도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면 예수를 떠나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증거하는 신자라면 자신부터 항상 예수님을 알고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삶에 가치를 두는 자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진심으로 예수를 증거하는 길을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예레미야의 말을 들은 고관과 백성들이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였으니 죽일만한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들은 15절에서 여호와가 나를 보냈다는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말의 내용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예레미야가 누구의 보냄을 받아서 누구의 말을 전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죽일만한 이유가 없다는 고관과 백성들의 말이 있은 루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서 미가 선지자에 대한 말을 합니다. 미가도 여호와의 말씀을 예언했지만 유다 왕 히스기야와 백성들이 그를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히스기야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간구하였고 그로 인해서 여호와가 선언한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우리야 선지자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야도 예루살렘 성과 그 땅에 대해 경고하고 예언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여호야김 왕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야는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을 쳤지만 여호야김은 애굽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우리야를 잡아와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져 버렸다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나 미가 우리야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각기 다릅니다. 미가의 말을 들은 왕과 백성들은 미가를 죽이기는커녕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간구하였는데, 예레미야는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고 우리는 애굽에까지 쫓아온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말씀을 전파한 사람의 능력의 문제일가요? 미가가 말씀에 능력이 있어서 왕과 백성을 회개하게 했고, 예레미야와 우리야는 능력이 없어서 말씀을 전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까?
능력은 말씀에 있는 것이지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결과는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으로 피신한 우리야는 2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어코 연행되어 죽임을 당하게 하신 반면에 예레미야는 아히감의 도움으로 죽임을 면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의 성취이지 우리의 안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복음을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부흥이 안 되고 고생을 해야 하는가?라는 불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그 보상으로 뭔가 주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버리십시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일에 도구로 부름 받아 사용되는 것 자체가 영광이며 보상입니다. 죄인 된 인간으로써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었다는 것보다 더 영광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뜻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무엇을 누리며 살든 그것은 자기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어진 것을 서로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저울질 하는 것은 하나님께 부름 받아 하나님의 일에 참여된 삶의 가치를 알지 못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살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살 뿐입니다. 어디에서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심지어는 자신의 안위보다 십자가의 가치가 더 크고 중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 세움 받은 것이 신자입니다. 나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믿음의 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길에 순종하며 주의 이름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안 되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성령 받은 신자로서 세상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진리 때문에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