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6 내가 또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전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여호와의 성전의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
17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을 황무지가 되게 하려느냐
18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와 유다의 왕의 궁전에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19 만군의 여호와께서 기둥들과 큰 대야와 받침들과 이 성에 남아 있는 기구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나니
20 이것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귀인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옮길 때에 가져가지 아니하였던 것이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성전과 유다의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기구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22 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내가 이것을 돌보는 날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니라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올려 와 이 곳에 그것들을 되돌려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본문에는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왕을 섬기면 산다는 것입니다(17절). 산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왕을 섬기면 구원 된다는 뜻입니까?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 구원과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 곧 사는 길이라면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 믿음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믿음의 바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그 같은 현실에 처하게 될 것을 예레미야의 목에 줄과 멍에를 메고 보여주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는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유다가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바벨론으로 빼앗긴 성전의 기구 역시 바벨론에서 속히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 예언이니까 듣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예레미야의 말보다는 거짓 예언에 더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유다 백성이 생각할 때 하나님은 자신들을 도우시는 분이기에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게 하시는 것이 당연하고, 바벨론에 빼앗긴 성전의 기구 또한 속히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의 하나님보다는 거짓 선지자의 하나님을 더 믿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유다를 도우십니다. 하지만 도우심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고통과 어려움에 빠질 때 그 고통과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는 도우심으로 여긴다면 예레미야의 말보다는 거짓 선지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을 섬기라 그러면 산다’는 말은 유다 백성에게는 전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부인하고 싶은 것이 그들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벨론 왕을 섬기라는 것은 유다는 망하고 바벨론은 흥한다는 뜻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다는 망하게 하고 이방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레미야의 말에 반발하며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 말에 희망을 두면서 하나님의 도우심만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을 섬기라는 말은 하나님이 대한 그러한 생각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도우신다는 생각에 갇혀 있기 되면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되고 결국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을 섬기라는 선지자의 말은 유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기를 촉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기에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죄를 보게 될 때 유다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마음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다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유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방향으로 베풀어질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도우심인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뉘우침의 의미가 아닙니다. 죄를 안다는 것은 죄의 무게 앞에 무릎을 꿇게 됨을 뜻합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죄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 진심으로 죄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를 알게 되면 자신이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에 마음이 향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입니다. 모든 죄를 덮어주시고 보지 않으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크게 다가오게 됩니다.
또한 세상의 무엇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비교할 수 없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죄를 알게 하시고 주를 바라보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고통으로 밀어 넣으시고 어려움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으로 하여금 유다를 치게 하시고 예루살렘이 무너지게 하시고 포로가 되게 하시고 고통을 겪게 하시는 이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마음을 두는 유다 되게 하기 위한 일이기에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이야 말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성전이 무너지게 하시고 성전의 기구까지 모두 바벨론에 빼앗기게 하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유다가 성전에서 행했던 제사 행위가 그들을 살리는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수없이 제사 의식을 행했지만 그들의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의만 쌓여갔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다를 당연히 도우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다는 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깨어지지 않는 한 유다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신자가 이러한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당위성부터 버려져야 합니다. 오히려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까?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만약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의한 것이지 우리의 의지나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죄의 길로만 가고 있을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죄를 알게 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두는 자로 살아가도록 도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도우심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자의 은혜를 고백하게 되고 나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인자하심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