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05.05 09:40

(76강) 광야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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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1:1-6http://onlycross.net/videos/jer/jer-31010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5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6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설교>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심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출애굽입니다. 그리고 이 출애굽은 40년의 광야생활로 이어집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은 결코 편한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물과 양식을 구하기 힘든 땅에서 유리하면서 40년을 지낸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광야 생활을 두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입은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생존을 하나님이 책임지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을 책임지신다고 하면 자신이 평소에 원했던 삶을 살도록 책임져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입은 은혜는 만나였고 메추라기였습니다.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준 신비한 음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큰 은혜를 입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40년을 만나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만나 자체를 은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생존을 책임지신 것은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이스라엘이 되게 하기 위한 책임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광야에서의 생존을 통해서 하루의 일용할 양식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배워야 했고 매일 주어지는 만나를 먹으면서 생존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백성들에게 광야의 은혜는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들은 생존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질적인 삶을 누리는 생존을 원했고 그러한 은혜가 주어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이 그들로 하여금 우상을 끌어들이게 한 것이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음으로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멸망의 자리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광야에서 은혜를 입게 하시고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안식을 얻게 하신 일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의한 것으로 바라봅니다.

 

 

3절에서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는 내용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출애굽 사건과 광야의 은혜에 담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유다의 결국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바라봅니다. 그래서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4절)는 노래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실 것이고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즐거워하며 춤을 추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멸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낙심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의 세월에 막막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을 주시는가?’라고 원망도 할 것입니다. 늘 자기 생존에만 마음을 두고 살기 때문에 생존에 문제가 발생하면 낙심과 불안과 원망으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형편이 어떻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출애굽의 사건과 광야에서 입은 은혜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당장 현재의 문제가 해결되고 잘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지금 자신의 배고픔이 채워지는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복과 지금 내 눈에 목격되는 현상들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배부름과 미래의 천국을 하나님의 복과 은혜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레미야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저울질 합니다. 좋은 것을 많이 누리면 사랑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기고, 반대로 형편이 좋지 않으면 사랑 또한 적게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으로 연결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니까 하나님이 크게 사랑하셔서 많은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그런 기준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기준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세상 것이 주어지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하늘의 것이 주어지는 것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영원한 안식으로 이끄시듯 우리를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안식의 세계에 속한 백성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세우시겠다는 것은 무너짐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즉 무너짐이 없이는 다시 세우는 것도 없습니다. 무너짐이 있어야 무너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에 의해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무너짐을 당했습니다. 철저하게 무너짐을 겪습니다. 그 어떤 희망도 둘 수 없는 상태로 무너졌습니다.

 

 

이들에게 행하실 하나님의 일은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물론 강한 나라로 세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세움을 받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즐거워하고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에게 무너짐은 축복입니다. 밑바닥까지 무너져서 생존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올 때, 일용할 양식으로도 감사하게 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마음에 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너짐은 굳이 세상일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모두 꺾여 버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무너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뿐더러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벌레만도 못한 나를 건지시고 영원한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사건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아무것이 없이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비록 현재의 삶은 힘들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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