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10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11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13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14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사람들이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나름대로 희망적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러한 희망은 사그라지면서 점차 실망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나아지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다닐수록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잠잠하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이 없다는 불신앙적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늘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은 잠잠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자신의 힘으로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래서 치유 기적과 같은 가시적인 현상을 목격하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여기게 되면서 밋밋한 신앙에 생동감을 주는 돌파구로 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잠잠히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잠잠히 계시는 분으로 생각한다면 믿음의 고백을 여러분의 선택과 의지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여러분이 원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이 말을 할 당시에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한지 100년이 훨씬 지났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미 망한 이스라엘을 두고 나의 장자라고 하시고 아버지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라면 이스라엘을 앗수르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런 식으로 돕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앗수르를 보내서 망하게 하십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 울며 돌아올 것이라고 하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기쁨만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러한 경험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없는 편한 인생을 누리게 하시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것이 곧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세상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본 모습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진 본래의 모습이 모두 깨뜨려지고 무너져야 가능한 것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장자로 삼은 자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결국 무너짐도 실패도,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도 하나님이 택한 자기 백성을 천국의 사람답게 만드시고 천국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일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7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모으실 남은 자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으로 말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약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자로 만드셔서 다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남은 자가 되어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다면 약자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도 또한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붙들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무너뜨리시면서 약자가 되게 하심으로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되기에 계속되는 고통에서 하나님은 잠잠하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 8: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알다시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에게 펼쳐진 여정은 광야였습니다. 약속의 땅을 약속하셨으면서도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40년을 지내게 하십니다. 그 의도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광야에서 유리하며 주리고 만나를 먹게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눈을 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떡에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모든 희망을 두는 자가 되게 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은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 주리고 목마르고 40년간 유리하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광야의 여정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드러나게 하시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은혜요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신자가 모든 일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즉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기의 믿음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떡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하나님의 인도는 시시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4절에서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복으로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곧 생명의 복입니다.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시기 위해 하신 하나님의 일로 만족함을 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이기에 신자는 현재의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기쁨은 현재의 넉넉한 삶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