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5.04 10:26

(2강) 빛과 어둠

조회 수 550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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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3-5http://onlycross.net/videos/gen/gen-01030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설교>

 

창조 사건은 창조로만 볼 것이 아니라 종말과 연결된 시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종말이 포함되지 않은 창조로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으시고 심판해 버리신다는 말씀에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창조 사건을 종말과 연결된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창조가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완성은 종말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을 위해 창조된 세상을 무너져야 하고 이것은 애당초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것입니다.

 

 

만약 창조를 완성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키지 못한 결과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완성하고자 하신 세계가 따로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완성하고자 하는 세계를 위해 사탄을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계 21:1절을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 하늘과 땅과 바다는 이미 없어질 것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있게 하고자 하신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의 완성으로 계획하시고 처음 하늘과 땅과 바다를 있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왜 심판하시는가?’라는 의문은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죄로 인해 더러워졌기 때문에 심판 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은 세상이 죄로 더러워지는 것을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 사건을 인간에게 초점을 두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빛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셨고, 빛과 어둠을 나누신 후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으로 밤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창조 첫날에 되어진 일입니다. 자칫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지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빛이 있게 하셨을 뿐이지 어둠까지 있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즉 어둠은 빛이 있기 전의 세상 상태였던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에 빛이 있게 하셔서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첫날에 빛과 어둠이 등장할까요? 16절에 보면 넷째 날에 두 큰 광명체를 만드셨는데 두 광명체는 태양과 달입니다. 그리고 태양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달로는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빛과 어둠은 태양과 달이 지음 받은 넷째 날에 언급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보면 첫날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은 태양, 달과는 상관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 인식하는 빛과 어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시 36:9절을 보면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고 말합니다. 빛을 생명의 원천으로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하면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첫날의 빛은 생명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첫날에 빛이 있게 하신 것은 창조의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 시작하심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은 세상을 장악한 어둠을 드러내시고 어둠을 물리치시며 생명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일이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조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을 무에서의 창조라고도 합니다.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존재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말씀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창조 방식이 구속 사역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는 무관한 전적으로 거저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빛과 어둠의 세계가 장차 어떻게 드러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빛의 세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졌음을 믿게 됩니다. 반면에 어둠의 세계는 인간에게 초점을 둡니다. 성경을 보면 창조의 세계가 이처럼 두 세계로 나누어져 흘러가게 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애당초 어둠이 존재했습니다. 어둠이 존재하는 상태에서의 창조를 창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창조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하신 세상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지어지고 존재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져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어둠이고 빛인가를 드러내는 도구로 인간을 지으십니다. 인간을 도구 삼아 빛과 어둠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것을 두고 보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어둠의 그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이 선악과 먹는 것을 말리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간의 죽음이 없었을 것이고 무엇이 어둠에 속한 것인지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악과로 말미암아 드러난 어둠은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있게 하신 피조물의 위치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향상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어둠의 실체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상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과 전혀 다른 빛의 세계입니다.

 

 

엡 5: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전에는 어두움이었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 그대로 항상 자기 위치를 보다 더 향상시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존재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낮아진 길로 가신 빛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 확대를 위해 사는 어둠의 세상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질상 어둠에 속한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는 길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 대대로 자기 확대를 꿈꾸며 자기 확대로 만족해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를 말씀의 크신 능력으로 간섭하시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창조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시각과 흐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이 어둠의 상태로 있었던 것은 태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사탄이 땅으로 내어 쫓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사탄이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을 어둠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전쟁을 일으킨 것도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피조물로만 존재하기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더 확대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있고 싶어 전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어둠의 속성이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보시면 빛의 세상과 어둠의 세상이 어떻게 다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리적인 실천으로 빛으로 여기는 것도 빛과 어둠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착각입니다. 빛의 세계는 사람의 상식과 지식으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말씀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빛으로 깨닫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빛의 세계에 속한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만을 참된 선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처럼 자기 행함을 모두 내려놓았기 때문에 행함을 기준으로 한 높고 낮음 또한 없게 됩니다.

 

 

빛의 세계에서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게 됩니다. 세상은 이렇게 두 세계로 구분되어 시작합니다.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빛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빛의 아들답게 살게 하심으로 어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빛에 붙들어 놓으시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 davidyoo 2020.03.02 16:36
    주님, 어둠속에 있는 저를 건지소서! 한만큼받는다는 사탄이지배하는 세상논리로 신앙해왔습니다. 빛되신 주여,고침받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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