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설교>
아침에 눈을 뜨면 방안이 햇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밖을 보면 온 세상이 햇빛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이러한 일상에서 우리는 햇빛을 시시하게 바라봅니다. 마치 해가 없어도 되는 것처럼 햇빛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우리가 매일 바라보는 해는 하나님이 창조 때 만드신 것이고,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햇빛의 기운을 받아 생육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가득한 햇빛은 사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공평하게 비췹니다.
햇빛 아래서는 부자 가난한 자, 배운 자 배우지 못한 자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드러내고 있는 은혜의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를 보면서도 그 같은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때문에 햇빛은 길가의 이름 없는 풀도 차별하지 않는데 우리는 쓸모없게 여깁니다. 이것이 잘못된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광명체를 만드시고 큰 광명체로는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낮은 광명체로는 밤을 주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십니다. 14절에 보면 두 광명체로 낮과 밤을 나누시고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낮을 주관하고 밤을 주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낮과 밤은 해와 달이 있음으로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자전은 지구가 스스로 돌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지구가 스스로 도는 자전 때문에 낮이 되었다가 밤이 되는 것이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공전으로 인해 계절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밀물과 썰물이라는 현상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달의 인력 때문입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게 되고 월을 만들고 12개월을 1년으로 계산하는 모든 것이 해와 달의 존재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라고 말합니다. 즉 신자는 낮과 밤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자연 현상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해와 달로 인해서 나타나는 징조와 현상들은 그저 무의미하게 돌고 돌며 반복되는 자연의 운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다스림을 증거하는 것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해와 달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점을 염두에 둔다면 신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결코 인간의 열심과 업적을 세움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십니다. 만약 해와 달이 창조된 날과 짐승과 생물이 창조된 날이 바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짐승과 생물의 생존에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즉 짐승과 생물, 그리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에서 생각하고 확인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생육, 번성, 충만이라는 단어를 종합해보면 번식하여 세상에 그 숫자가 많아지라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부흥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해지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20절에 보면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 보면 번성은 생물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의해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물이 있음으로 바다의 생물이 번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땅의 짐승도 다르지 않습니다. 땅이 식물을 내어야 짐승의 생육과 번성이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하신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생육과 번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충만은 단지 개체의 수가 증가하고 많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 담아 선포하는 도구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것이 충만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을 충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완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 안에서 세상을 본다면 길가에 피어있는 이름 없는 풀 한포기도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존재하고, 따라서 그 풀은 하나님이 피게 하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복 주심과 창조의 은혜를 나타내는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시각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만은 사라지고 감사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복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합니다.
마 6:29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입은 영광과 들의 꽃 하나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솔로몬이 입은 영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솔로몬의 영광을 꽃 하나만도 못하다고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솔로몬의 영광은 솔로몬의 이름을 드러내는 영광입니다. 하지만 들의 꽃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고 자라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솔로몬의 영광보다 꽃 하나가 더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꽃 하나만도 못한 헛된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헛된 인생을 헛되게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헛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나타내는 길로 가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야 말로 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고 복음을 알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일까요? 물론 구원과 무관하다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복 안에 있는 자로써 하나님의 복을 증거 하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며 하나님께 만족이 되시는 상태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에 취해 살아가는 인간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한 세상일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심판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심판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창조를 말씀합니다. 이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해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새로운 나라를 보시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할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 됨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죄를 알고 예수님의 희생을 알며 감사할 수 있는 생육과 번성은 그리스도 밖의 세계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징조고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은혜를 알고 자신의 죄인 됨을 보게 되는 것으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았음을 확인하며 그것이 복의 세계임을 믿는 자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