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3.15 09:38

(42강) 전능한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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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7:1-8http://onlycross.net/videos/gen/gen-17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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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설교>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리고 본문 1절에 보면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증거가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물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래 대신 하갈이라는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이루고자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3절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엎드린 것도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4,5절)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람이란 이름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 즉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것은 이미 12장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하시는 것은 단순히 약속을 재확인시켜주기 위한 의미라기보다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힌트가 ‘되게 함이니라’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대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담고 있습니다. ‘되게 함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아브람은 현재 사래에게서 난 자식이 없습니다. 이스마엘이 있지만 그는 하갈이라는 인간적 방법의 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래는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입니다. 따라서 사래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그것은 말씀을 성취하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전능성이 증거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 하시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란 이름이 새롭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못하여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일을 책망하는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엇인가를 깊이 알아가며 말씀하시고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잘못과 실수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인간의 노력과 믿음이 담긴 협조가 필요했다면 언약은 결코 성취될 서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에서부터 이미 언약은 깨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사래는 바로의 아내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창조 후 인간의 모든 역사 속에서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한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인간을 하나님의 일을 위한 협력자로 만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전도하지 않고 선교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지장이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인간의 악함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하지 않은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훼방자입니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다고 하셨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할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눈에 보이는 조건과 형편을 계산하며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을 동원하여 뭔가를 이루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라며 반박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죄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반박일 것입니다. 이것은 뭔가 행하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한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행함을 신앙의 기준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1절에 보면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행하여 완전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보기에는 완전한 행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무지 흠잡을 수 없는 행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속을 보지 못하는 우리가 외적 행함을 기준하여 판단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보이는 행함을 기준하여 속 중심을 판단하기 때문에 행함이 흠이 없으면 사람 자체가 흠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행함으로 완전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행함이 아니라 속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에게는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완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으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완전한 행함이 가능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의 힘과 열심히 되어진다는 생각은 끊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대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도우셔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되어지는 일은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조차도 아브라함의 힘으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행하여 완전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루어야 할 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완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심으로 행하여 완전한 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화목제물 되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것에 해당됩니다. 기도를 하건 안하건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완전한 자입니다. 허황된 말 같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행함으로 서로를 저울질 하고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완성과 완전한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결과입니다. 즉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이 전능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도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음의 길에 있게 하시고 기어코 생명에 들어가게 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능입니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드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을 기어코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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