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설교>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장성한 모세를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고 모세의 출생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 세우시고 애굽으로 보내심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는 것이 출애굽의 중점이라면 모세의 출생 이야기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의 출생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들 역시 장성한 자를 불러내어 선지자로 보내셨을 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모세의 출생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출애굽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계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모세의 일생 자체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인사건으로 인해서 애굽에서 도망친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양 떼를 치면서 40년을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양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모세 나이가 80세입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나타나셨는데 그것은 모세에게 큰 광경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떨기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신비한 큰 광경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떨기나무는 덤불처럼 가는 가지로 되어 있는 나무였고 따라서 불이 붙으며 순식간에 타서 사라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 앞에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는 불꽃으로 나타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분명 모세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가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을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미디안으로 도망친 모세는 이드로의 양 떼를 치면서 40년을 지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모세로서는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여겨지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된 동기가 동적인 히브리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인데 그 결과가 바로의 궁에서 도망을 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사람을 돕기 위한 일이었으니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이 언급하지 않지만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불만은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드러납니다.
9,10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가라는 말을 들은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라고 반응합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역력히 드러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에게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바로의 궁에서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생활했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으로 힘이 넘치는 시기였고,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는 권력이 있었고, 자기 민족에 대한 의협심도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모세로서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해 낼 수 있는 적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바로의 궁에서 도망치게 되는 것을 두고만 보셨고 이드로의 양 떼를 치면서 40년을 지냈는데도 그냥 두고만 보셨습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모두 허비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80세의 나이로 고작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처지에 있을 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불만이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모세의 항변을 미리 아시고 그에 대한 답으로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나무로서의 가치가 없는 쓸모없고 약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불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타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 말할 때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사람을 위해 애굽 사람을 죽일 때도 모세에게는 자신의 힘을 히브리 민족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은 사람에 의해 되어진다는 일반적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사람은 언제나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사람이 도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세우신 아브라함도 약속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에는 쓸모없는 방해물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약속이 포기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에 인간은 왜 부르시는 것일까요? 인간은 제외하고 하나님이 직접 모든 일을 이루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인간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일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은 모든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이 홀로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을 들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고백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80세가 되어 이드로의 양 떼를 치고 있는 모세는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애굽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반응하는 모세는 떨기나무를 보면서 그것이 곧 자신의 모습임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존재성임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반응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모세의 강함인 것입니다. 즉 모세의 강함은 모세에게 있어서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임을 답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 된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인생의 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힘을 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생의 답을 세상의 힘에 두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때문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말하면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이루시고 일하시고 계심을 보지 못합니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는 ‘너는 비록 약하고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이지만 내가 너에게 함께 함으로 나의 모든 일을 이룰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강함은 세상의 힘을 대항하는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믿음 안에서 실패가 없습니다. 실패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했지만 되지 않을 때 실패라고 합니다. 하지만 함께 하신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다면 실패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현재의 삶으로 인생을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책임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