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그 해석에 있어서 인간의 입장이 개입되는 것을 불허한다. 철저히 인간의 입장은 배제한 채 하나님의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인간의 입장이 개입된 성경 해석은 필연코 인간의 종교적 감정에 의한 요청에 의해서 인간의 필요를 확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종교적 감정이나 요청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세상에 확증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 입장에서 탈피하고 오직 하나님의 입장에 정직해 지는 것만이 성경의 존재이유에 긍정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의도에 가장 성실하게 접근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성경이 무엇을 지향하고 기록되어 있는가를 명백하게 증거 한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다.
성경은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지향한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개인 지향의 관점으로 성경을 본다면 관심은 자기 구원에 고정될 수밖에 없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하나를 자기 구원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극히 자연스런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구호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독교만의 자랑거리가 아니다. 전 세계의 모든 종교의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의 부처의 사랑, 즉 자비는 인간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벌레 하나 풀 한 포기에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의 모 승려는 ‘기독교의 사랑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접시 같은 사랑이지만 우리 불교의 사랑은 모든 만물에 확대되어 있는 바다 같은 사랑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왜 모든 종교의 신은 공통적으로 ‘사랑’이라는 속성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이 자기 구원에 집착되어 있는 결과이다. 종교에는 필히 초월자, 즉 신이 존재한다. 초월자가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런데 그 초월자는 인간의 필요 요구에 의해서 등장한다.
고대로부터 모든 종교는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난다. 인간에 의해서 발생하고 인간을 위한 종교로 존재한다. 자기 구원에 집착한 인간이 세상 속에서 자기 한계를 경험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세계로의 도약을 위해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 즉 초월자를 만들어 놓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외친다. 나를 사랑하는 신이어야 내가 신의 필요를 요청할 때 두말없이 초월적인 힘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신은 사랑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등장하는 이유이다. 신의 사랑 속에서 자기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이 인간을 사랑하는 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의 종교성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고 사랑을 받아내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초월자에 대해서 섬김의 의식을 실행한다. 섬김을 인간과 초월자의 관계를 유지하는 도구로 삼는 것이다. 내가 정성을 다하는 것만큼 신도 자신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로 특별한 시간을 정하고 공간을 마련하고 재물을 마련하여 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신에게 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신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스스로 인간의 정서와 요구에 일치하는 초월자를 만들고 초월자가 요구하는 규칙과 명령을 만든 가운데 스스로 그 규칙과 명령에 준수함으로서 초월자의 마음이 드는 신앙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종교성이다. 물론 그 모두는 자기 구원을 지향하고 일어나는 종교행위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인간의 종교에 지금의 기독교를 대비시켜보면 과연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놀랍게도 종교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공통점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 인간에게 규칙과 명령을 내려서 준수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섬김을 위해서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여 거룩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시간과 공간에서 신을 찾는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 열심과 정성으로 섬기는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현 기독교에서 외치는 하나님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현 기독교의 모습은 타종교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종교라도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섬김을 요구하고 정성으로 신을 찾는 인간을 외면하지 않는다. 인간이 신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종교적 기준 속에서 기독교가 타종교와 일치한다면 그것은 자기 구원에 집착한 인간의 탐욕이 종교로서 일치된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출3:14). 스스로 계신 분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이지 결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독자적이다. 인간의 요구와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 마음대로 하신다. 따라서 신앙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이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동조를 얻기 위해서 신의 마음에 들 행동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충실하고 열심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시는데 문제는 인간 쪽에서 사랑을 받을만한 준비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섬김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을 받기 위한 섬김의 규칙을 제시하고 그 규칙을 준수함으로 신앙인의 반열에 서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부여받는 신자로 살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규칙에 대한 준수는 명목은 하나님 섬김이지만 내용은 모두가 자기 사랑을 위한 것으로 가득 차게 된다. 기도를 해도 자기 사랑이고 성경을 봐도 자기 사랑이며 봉사를 해도 결국 자기 사랑을 위한 종교인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현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아닌 전혀 다른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을 향해서 진노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이들은 오직 자기 구원이 최대 관심사이기 때문에 믿음도 사랑도 축복도 모두 자기 구원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설령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해도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그럴듯한 행위를 궁리하게 된다. 이들에게 자기 부인은 관심 밖이다.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의 구원과 생계를 도와주는 차원으로 이해한다.
복음 역시 인간을 돕는 복음으로 탈바꿈한다. 이들에게 ‘순수한 복음’만을 전하면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는 논리라고 하면서 거부한다. 행위를 통해서 믿음을 더욱 믿음답게 만들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 행위가 부정 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구원에 집착한 인간의 이기심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로 규정한다. 죄란 인간이 피조물의 취치를 벗어나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구원이 선택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행함도 개입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선택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알 수 있는 길은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가치 없는 인간임을 알 때이다.
멸망과 진노의 자리에 있던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자는 모든 관심이 자기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향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참된 신자는 개인의 구원이 기쁨이 아니라 나같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 아들이 희생이 더욱 크게 부각되어지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이런 신자들은 은혜에 보답하겠노라고 또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겠노라고 설치지 않는다. 신자의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죄인이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게 됨을 감사할 뿐이다.
따라서 성경을 가장 정직하고 순수하게 들여다 본 사람은 성경에서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발견할 뿐이다. 그리고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진 결과로 발생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의지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한다는 것조차도 불가능으로 여긴다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그것을 자기 구원과 연결시키지 않고, 자기 의로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표로 여기지도 않으며 행함 자체를 그 어떤 의미에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신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인정받을 수 없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신이 요구하는 의의 필요성에 대해서 교회의 의식과 봉사, 또는 규칙 준수를 신앙의 결여를 보상하는 수단으로 삼아버린다. 신앙은 은혜에서 은혜로 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기초한 종교인들이 신앙을 은혜에서 행함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현 기독교의 모습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바를 지향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에 순종한 방식으로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 태반이다.
현 기독교인이 스스럼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하겠다고(그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든 뭐든 상관없이)나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첫머리에서 말한바 대로 성경은 그 해석에 있어서 인간의 입장이 개입되는 것을 불허한다는 원칙을 무시한 결과이다. 이러한 결과가 법 준수라는 행위를 낳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가 개입되는 것을 불허하는가?
롬3:10-18절에 보면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면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또 시 14: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선언이다. 이 선언 앞에서 과연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고집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서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행위가 선한 행위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성경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가 선한 행위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도 역시 ‘아니다’라고 답할 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창조의 능력은 말씀이다. 그렇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말씀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성립을 위해서 말씀을 대신하여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다.
따라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은 피조물이 말씀에 위치에 있을 때 성립된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이다. 이 상태를 가리켜서 안식, 복이라 말한다. 때문에 안식이 깨어지고 세상에 무질서와 혼란이 개입되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피조물이 말씀을 거부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창조의 안식은 피조물이 말씀에 위치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에 안식의 상태가 깨어졌다면 그것은 피조물 편에서 말씀에 대한 위배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범죄의 주체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죄에 대한 해결과 회복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신다.
회복이란 예전의 상태로 돌이킨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위치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한 약속을 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걸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앞으로의 세상 역사는 이 약속 위에 고정되어 진행된다.
약속을 기준으로 세상은 둘로 구분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다. 여자의 후손은 약속을 믿고 약속 안에서 사는 자이고, 약속을 거부하는 자들은 뱀의 후손이 된다. 약속 안에 사는 자란 하나님 편에서 죄를 극복하고 생명을 부여하는 은혜의 방식에 들어오는 자이고, 약속을 거부하는 자는 선악 지식을 고수하며 자의적 선악판단으로 살아가는 자다. 이 방식에 의해서 앞으로 생명을 부여밥은 산 자는 은혜의 방식에 순종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누구든 은혜의 방식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노아 홍수는 약속을 거부하는 자는 모조리 진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다.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난 것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이다.
창6:9절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한다 이것으로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 성취가 인간에게 매이게 된다. 인간이 잘하면 약속이 성취되고, 못하면 약속이 성취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노아가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창6:8).완전하다는 것도 흠없는 자라는 뜻이 아니라 은혜 안에 사는 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언약을 세우신다(창6:18). 노아 언약은 노아가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노아가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잡아 번제를 드리자(창8:20)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창8:21)라고 하신다. 인간에게는 전혀 가능성을 두지 않는 말씀이다. 마음의 계획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즉 인간에게서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선을 기대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의 번제 향기를 흠향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오직 정결한 제물의 희생뿐임을 말해준다. 이로서 땅은 노아의 언약 안에서 구원이 가능한 땅 되었고, 그 누구라도 언약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의로서 구원을 엿보게 되면 언약의 원리에 의해서 저주를 면치 못한다.
언약의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정결한 제물의 희생이 우리를 살린다는 은혜의 원리를 이해했을 때 약속 안에 있는 자로 인정받는다. 결국 은혜의 원리를 이해한 사람은 자신에게서 의를 찾지 않을 것이고 의가 되는 행동을 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정결한 제물의 희생이 피만이 하나님을 만족케 했음을 알기 때문에 희생의 피에 생명의 의미를 두게 되지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된다.
땅위에서는 인간들이 다시금 뱀의 후손의 속성을 드러낸다. 그것이 바벨탑이다(창11:1-9). 바벨탑은 인간의 힘을 결집하여 스스로 땅위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뜻을 거부하시고 언약의 땅에 합당한 민족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다(창12:1,2).
그러나 언약의 땅에 합당한 민족을 이루는 것은 아브라함이 할 일이 아니었다. 아브라함도 단지 하나님의 약속에 사용되는 도구였을 뿐 모든 일의 주체자는 여호와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을 통해서 성취될 것임을 알게 된다.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에 반발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개입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창22:12절에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회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신 것은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지시에 굴복하는 정신을 확인하셨다는 뜻이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죽어야 할 죄인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의 희생으로 생명이 부여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제물의 희생이 있었다고 해서 무조건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희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이지만 인간에게는 순종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순종이란 인간의 선악판단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런 속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셨다면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은 이런 언약정신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나라가 되어야 한다. 만약 이스라엘이 언약정신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언약 정신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확고하게 다져진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10가지 재앙으로 치시는 것은 바로 왕이 여호와가 누구인지 모른데 대한 대가이다(출5:2).
바로의 강퍅은 여호와의 원수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마지막 재앙으로 장자를 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원수는 곧 인간임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인간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장자는 거부하신다. 오직 할례언약안에서만 장자로 인정할 뿐이다(창17:13-14).
언약 안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만 아들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어린양은 심판을 극복한다.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행위가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흠없는 어린양이 의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죽음이라는 심판에서 보호하는 것이다.
정결한 것의 죽음을 대신 받으시고 넘어간 것이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어떤 속성을 지닌 나라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발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피를 믿음으로 존재하는 나라임을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지키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 하신다. 유월절을 기준으로 백성 됨과 백성 아님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월절은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의식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물론 유월절에 드리는 의식의 방법까지 하나님 편에서 제시하셨지만 그것은 의식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월절의 정신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기 위해서이다. 유월절에 행하는 의식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정월 14일 해질 때부터 시작한다(출12:6,18). 그러나 민수기 9:11절에서는 유월절이 한번 더 추가된다. 그 이유는 사람의 시체로 부정케 된 사람이나 먼 여행 중이어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배려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유월절은 특정한 날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식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죽음이 우리를 넘어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유월절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결국 희생의 의미를 아는 자만이 참된 이스라엘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출13:9절을 보면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국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고 하신다. 유월절이 율법으로 등장한다. 결국 처음의 율법은 문자가 아니라 유월절 정신이었음이 드러난다 죄인을 위해서 희생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이스라엘의 율법이다.
이스라엘은 희생의 하나님께서 원수 애굽을 치심으로 인도함 받는다. 그리고 이들이 곧 여호와의 처소이고 그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가 된다(출15:17). 결국 성소란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건져낸 무리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모임,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이것이 그들이 지켜야 할 율례이고 율법이다.
출 15:25,26절에서 마라의 원망 사건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6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규례는 유월절밖에 없다. 즉 십계명과 그 외 규례들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을 때인 것이다. 그렇다면 십계명과 그 외 규례들이 주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26절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을 미래에 율법이 주어질 것을 대비해서 미리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십계명 등의 계명이 주어지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지켜야 할 법이 없는가? 이미 유월절이 율법으로 등장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유월절을 기초로 하여 이해해야 한다. 즉 26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계속 유월절의 정신 안에 거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보시고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애굽에 내린 질병은 그들이 여호와의 심판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는 것은 심판 안에 있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료의 결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치료는 유월절 정신에 의해서 주어지고 있다. 이것이 출애굽의 주제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이란 옛 세상과 결별하고 새로운 생명세계의 영향을 받는다 홍해를 건넌 것은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았다는 뜻이 아니라 단절된 생명 세계의 영향력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영향력에 붙들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여호와의 희생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영향력 안에 산다면 그들은 자신의 생존에 대해서는 초월을 해야 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시험하시는데 그것은 칠일에 안식하는 것이다.
출 16:4절에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율법은 무엇인가? 유월절 정신이다. 즉 날마다 비같이 주어지는 양식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희생이 우리를 살린다는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시험이 칠일 때는 거두지 말라는 것이다.
23절에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고 한다. 이스라엘이 칠일 째에 만나를 거두던 것을 중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향력 안에 있음을 알고 생존을 초월했을 때이다.
하나님의 희생이 곧 자신들의 생명임을 알 때 생존을 초월한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원래 존재 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안식이라 한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안식일에 날짜를 지키는 의미가 있을까? 안식일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느냐를 묻는 것이지 날을 잘 지키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이라는 것은 문자화 된 법 하나하나에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속에 흘러오고 있는 정신, 즉 하나님의 희생을 이스라엘에 반영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시내산에서 주어지는 율법과 계명도 이런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율법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지상에 반영되는 점차적인 과정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다. 때문에 율법이 의미하고 있는 정신은 약속의 시작부터 이미 내포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희생을 이스라엘에 반영함으로서 이스라엘을 애굽과 차별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애굽과 차별된 나라, 즉 하나님의 희생이 반영된 나라로서 존재하라는 의미다. 결코 율법을 인간의 의와 노력으로 극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희생이 반영된 이스라엘은 필히 희생의 정신, 즉 자비가 보여져야 한다.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는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있어서는 안된다. 강자와 약자의 힘의 원리로 존재하는 애굽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란 공동체는 하나님의 희생의 원리로 지탱되어야 한다. 이 구원의 은혜를 십계명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과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구원의 은혜 안에서 희생의 원리로만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계명의 항목 하나하나를 실천하라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미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도 자질도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룩한 율법을 극복하도록 요구하고 기대한다는 것은 모순만 드러낼 뿐이다.
말씀에 대한 극복은 인간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하신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두 돌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을 주실 때 처음에는 하나님이 산 위에서 직접 돌판을 만들어 주신다. 이것은 산 위의 거룩과 산 밑의 비거룩과의 화해과 말씀의 관계 속에서 시도됨을 보여준다. 처음 창조된 인간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그 돌판은 산 밑의 비거룩의 존재들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깨어진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언약 밖의 존재로 밀려날 위기에 빠지게 되고, 이스라엘 스스로 말씀을 극복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합으로 이끌어 낼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돌판은 모세에게 직접 제조하도록 명령하신다(신10:1). 그리고 돌판과 함께 언약궤를 만들라고 하신다.
두 번째 돌판을 모세에게 제조토록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율법을 극복할 자질이 없는 이상 하나님이 다시 돌판을 만들어서 주신다고 해도 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세에게 돌판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돌판을 언약궤에 넣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극복하지 못한 죄의 책임을 땅에서 누군가가 해결하는 방식으로 은혜를 지속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신다. 그 해결 방식이 희생이다.
돌판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준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율법은 그리스도의 시대가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며 심판 받을 죄인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희생을 바라보도록 하는 역할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인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희생만 의지하고 산다면 그것이 곧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실천하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지 말씀에 대한 동적인 실천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가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희생을 의지할 자는 자기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포기할 때이다. 율법이 이 기능을 가지고 주어졌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완성의 때를 지향하고 있으며 율법의 완성자가 등장함으로 율법의 기능과 역할도 마감되는 것이다.
새시대는 그리스도의 행함으로 율법이 완성된 시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서는 율법은 살아있지 않으며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예수님 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고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의 희생을 드러내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마감된 율법을 다시 끄집어 내어서 윤리적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며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의 의를 바라보는 믿음의 모습이 아니며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비 복음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고 한 것이다. 또한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오실 것이라고 하였다 (갈3:19).의를 나타내는 것은 어떤 행위나 지킴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가치만 드러내는 것의 의다.
그리스도의 가치는 율법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법적인 규칙 준수나 윤리 도덕이 그리스도의 가치를 드러낼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죄를 모르면서 피만 내세우는, 즉 흠없는 피에 대한 모독이며 피를 단지 면제부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 신자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인식하며 그리스도의 피에 감사하는 것이 최고의 의다. 이 의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다(롬3:21).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실천을 의미하지도 않고 법준수를 뜻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우리의 힘과 노력과 실천으로 되어지지 않고 할 수 없는 것 앞에 굴복이다.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죄의 인식이기 때문에 철저한 죄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되어짐을 알고 자기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믿음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행함이 되어야 한다. 자기 행위를 포기하라는 말을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의 의에 있지 못하고 법적인 실천에 매어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에게는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믿음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 믿음에 접근하고자 하고 믿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의식과 지킴 등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은혜에 전혀 눈을 두고 있지 않고 있는 결과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는 ‘하라’는 명령 때문에 실천하지 않는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안에 있고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랑이 역사함으로서 하는 것이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 소유화하려고 한다. 믿음도, 사랑도 ,성령도 소유화해서 행함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인간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믿음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인간을 소유한다.
믿음은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믿음의 흔적들이 보여질 분이다. 사랑 역시 인간이 소유할 성질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스릴 때 우리에게서 사랑의 흔적들이 나타날 뿐이다.
성령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 인간을 소유하여 다스린다. 영원한 생명 역시 인간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영향력 안에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몇몇 규칙을 새롭게 만들어 놓고 규칙 준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가?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지키라, 행하라는 말을 한 것은 신약에서 신자다운 새 법적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역사하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사는 삶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깨우치고 확인시키기 위함이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의 실체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는 인간의 의를 삭제하는 것이지 결코 세워 가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죄의 인식임을 잊지 말자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종교적 감정이나 요청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세상에 확증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 입장에서 탈피하고 오직 하나님의 입장에 정직해 지는 것만이 성경의 존재이유에 긍정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의도에 가장 성실하게 접근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성경이 무엇을 지향하고 기록되어 있는가를 명백하게 증거 한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다.
성경은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지향한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개인 지향의 관점으로 성경을 본다면 관심은 자기 구원에 고정될 수밖에 없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하나를 자기 구원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극히 자연스런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구호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독교만의 자랑거리가 아니다. 전 세계의 모든 종교의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의 부처의 사랑, 즉 자비는 인간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벌레 하나 풀 한 포기에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의 모 승려는 ‘기독교의 사랑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접시 같은 사랑이지만 우리 불교의 사랑은 모든 만물에 확대되어 있는 바다 같은 사랑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왜 모든 종교의 신은 공통적으로 ‘사랑’이라는 속성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이 자기 구원에 집착되어 있는 결과이다. 종교에는 필히 초월자, 즉 신이 존재한다. 초월자가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런데 그 초월자는 인간의 필요 요구에 의해서 등장한다.
고대로부터 모든 종교는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난다. 인간에 의해서 발생하고 인간을 위한 종교로 존재한다. 자기 구원에 집착한 인간이 세상 속에서 자기 한계를 경험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세계로의 도약을 위해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 즉 초월자를 만들어 놓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외친다. 나를 사랑하는 신이어야 내가 신의 필요를 요청할 때 두말없이 초월적인 힘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신은 사랑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등장하는 이유이다. 신의 사랑 속에서 자기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이 인간을 사랑하는 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의 종교성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고 사랑을 받아내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초월자에 대해서 섬김의 의식을 실행한다. 섬김을 인간과 초월자의 관계를 유지하는 도구로 삼는 것이다. 내가 정성을 다하는 것만큼 신도 자신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로 특별한 시간을 정하고 공간을 마련하고 재물을 마련하여 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신에게 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신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스스로 인간의 정서와 요구에 일치하는 초월자를 만들고 초월자가 요구하는 규칙과 명령을 만든 가운데 스스로 그 규칙과 명령에 준수함으로서 초월자의 마음이 드는 신앙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종교성이다. 물론 그 모두는 자기 구원을 지향하고 일어나는 종교행위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인간의 종교에 지금의 기독교를 대비시켜보면 과연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놀랍게도 종교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공통점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 인간에게 규칙과 명령을 내려서 준수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섬김을 위해서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여 거룩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시간과 공간에서 신을 찾는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 열심과 정성으로 섬기는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현 기독교에서 외치는 하나님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현 기독교의 모습은 타종교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종교라도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섬김을 요구하고 정성으로 신을 찾는 인간을 외면하지 않는다. 인간이 신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종교적 기준 속에서 기독교가 타종교와 일치한다면 그것은 자기 구원에 집착한 인간의 탐욕이 종교로서 일치된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출3:14). 스스로 계신 분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이지 결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독자적이다. 인간의 요구와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 마음대로 하신다. 따라서 신앙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이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동조를 얻기 위해서 신의 마음에 들 행동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충실하고 열심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시는데 문제는 인간 쪽에서 사랑을 받을만한 준비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섬김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을 받기 위한 섬김의 규칙을 제시하고 그 규칙을 준수함으로 신앙인의 반열에 서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부여받는 신자로 살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규칙에 대한 준수는 명목은 하나님 섬김이지만 내용은 모두가 자기 사랑을 위한 것으로 가득 차게 된다. 기도를 해도 자기 사랑이고 성경을 봐도 자기 사랑이며 봉사를 해도 결국 자기 사랑을 위한 종교인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현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아닌 전혀 다른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을 향해서 진노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이들은 오직 자기 구원이 최대 관심사이기 때문에 믿음도 사랑도 축복도 모두 자기 구원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설령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해도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그럴듯한 행위를 궁리하게 된다. 이들에게 자기 부인은 관심 밖이다.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의 구원과 생계를 도와주는 차원으로 이해한다.
복음 역시 인간을 돕는 복음으로 탈바꿈한다. 이들에게 ‘순수한 복음’만을 전하면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는 논리라고 하면서 거부한다. 행위를 통해서 믿음을 더욱 믿음답게 만들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 행위가 부정 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구원에 집착한 인간의 이기심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로 규정한다. 죄란 인간이 피조물의 취치를 벗어나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구원이 선택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행함도 개입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선택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알 수 있는 길은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가치 없는 인간임을 알 때이다.
멸망과 진노의 자리에 있던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자는 모든 관심이 자기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향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참된 신자는 개인의 구원이 기쁨이 아니라 나같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 아들이 희생이 더욱 크게 부각되어지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이런 신자들은 은혜에 보답하겠노라고 또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겠노라고 설치지 않는다. 신자의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죄인이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게 됨을 감사할 뿐이다.
따라서 성경을 가장 정직하고 순수하게 들여다 본 사람은 성경에서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발견할 뿐이다. 그리고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진 결과로 발생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의지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한다는 것조차도 불가능으로 여긴다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그것을 자기 구원과 연결시키지 않고, 자기 의로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표로 여기지도 않으며 행함 자체를 그 어떤 의미에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신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인정받을 수 없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신이 요구하는 의의 필요성에 대해서 교회의 의식과 봉사, 또는 규칙 준수를 신앙의 결여를 보상하는 수단으로 삼아버린다. 신앙은 은혜에서 은혜로 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기초한 종교인들이 신앙을 은혜에서 행함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현 기독교의 모습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바를 지향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에 순종한 방식으로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 태반이다.
현 기독교인이 스스럼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하겠다고(그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든 뭐든 상관없이)나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첫머리에서 말한바 대로 성경은 그 해석에 있어서 인간의 입장이 개입되는 것을 불허한다는 원칙을 무시한 결과이다. 이러한 결과가 법 준수라는 행위를 낳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가 개입되는 것을 불허하는가?
롬3:10-18절에 보면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면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또 시 14: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선언이다. 이 선언 앞에서 과연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고집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서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행위가 선한 행위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성경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가 선한 행위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도 역시 ‘아니다’라고 답할 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창조의 능력은 말씀이다. 그렇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말씀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성립을 위해서 말씀을 대신하여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다.
따라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은 피조물이 말씀에 위치에 있을 때 성립된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이다. 이 상태를 가리켜서 안식, 복이라 말한다. 때문에 안식이 깨어지고 세상에 무질서와 혼란이 개입되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피조물이 말씀을 거부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창조의 안식은 피조물이 말씀에 위치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에 안식의 상태가 깨어졌다면 그것은 피조물 편에서 말씀에 대한 위배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범죄의 주체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죄에 대한 해결과 회복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신다.
회복이란 예전의 상태로 돌이킨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위치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한 약속을 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걸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앞으로의 세상 역사는 이 약속 위에 고정되어 진행된다.
약속을 기준으로 세상은 둘로 구분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다. 여자의 후손은 약속을 믿고 약속 안에서 사는 자이고, 약속을 거부하는 자들은 뱀의 후손이 된다. 약속 안에 사는 자란 하나님 편에서 죄를 극복하고 생명을 부여하는 은혜의 방식에 들어오는 자이고, 약속을 거부하는 자는 선악 지식을 고수하며 자의적 선악판단으로 살아가는 자다. 이 방식에 의해서 앞으로 생명을 부여밥은 산 자는 은혜의 방식에 순종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누구든 은혜의 방식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노아 홍수는 약속을 거부하는 자는 모조리 진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다.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난 것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이다.
창6:9절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한다 이것으로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 성취가 인간에게 매이게 된다. 인간이 잘하면 약속이 성취되고, 못하면 약속이 성취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노아가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창6:8).완전하다는 것도 흠없는 자라는 뜻이 아니라 은혜 안에 사는 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언약을 세우신다(창6:18). 노아 언약은 노아가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노아가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잡아 번제를 드리자(창8:20)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창8:21)라고 하신다. 인간에게는 전혀 가능성을 두지 않는 말씀이다. 마음의 계획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즉 인간에게서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선을 기대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의 번제 향기를 흠향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오직 정결한 제물의 희생뿐임을 말해준다. 이로서 땅은 노아의 언약 안에서 구원이 가능한 땅 되었고, 그 누구라도 언약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의로서 구원을 엿보게 되면 언약의 원리에 의해서 저주를 면치 못한다.
언약의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정결한 제물의 희생이 우리를 살린다는 은혜의 원리를 이해했을 때 약속 안에 있는 자로 인정받는다. 결국 은혜의 원리를 이해한 사람은 자신에게서 의를 찾지 않을 것이고 의가 되는 행동을 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정결한 제물의 희생이 피만이 하나님을 만족케 했음을 알기 때문에 희생의 피에 생명의 의미를 두게 되지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된다.
땅위에서는 인간들이 다시금 뱀의 후손의 속성을 드러낸다. 그것이 바벨탑이다(창11:1-9). 바벨탑은 인간의 힘을 결집하여 스스로 땅위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뜻을 거부하시고 언약의 땅에 합당한 민족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다(창12:1,2).
그러나 언약의 땅에 합당한 민족을 이루는 것은 아브라함이 할 일이 아니었다. 아브라함도 단지 하나님의 약속에 사용되는 도구였을 뿐 모든 일의 주체자는 여호와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을 통해서 성취될 것임을 알게 된다.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에 반발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개입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창22:12절에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회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신 것은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지시에 굴복하는 정신을 확인하셨다는 뜻이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죽어야 할 죄인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의 희생으로 생명이 부여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제물의 희생이 있었다고 해서 무조건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희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이지만 인간에게는 순종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순종이란 인간의 선악판단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런 속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셨다면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은 이런 언약정신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나라가 되어야 한다. 만약 이스라엘이 언약정신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언약 정신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확고하게 다져진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10가지 재앙으로 치시는 것은 바로 왕이 여호와가 누구인지 모른데 대한 대가이다(출5:2).
바로의 강퍅은 여호와의 원수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마지막 재앙으로 장자를 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원수는 곧 인간임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인간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장자는 거부하신다. 오직 할례언약안에서만 장자로 인정할 뿐이다(창17:13-14).
언약 안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만 아들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어린양은 심판을 극복한다.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행위가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흠없는 어린양이 의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죽음이라는 심판에서 보호하는 것이다.
정결한 것의 죽음을 대신 받으시고 넘어간 것이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어떤 속성을 지닌 나라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발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피를 믿음으로 존재하는 나라임을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지키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 하신다. 유월절을 기준으로 백성 됨과 백성 아님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월절은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의식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물론 유월절에 드리는 의식의 방법까지 하나님 편에서 제시하셨지만 그것은 의식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월절의 정신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기 위해서이다. 유월절에 행하는 의식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정월 14일 해질 때부터 시작한다(출12:6,18). 그러나 민수기 9:11절에서는 유월절이 한번 더 추가된다. 그 이유는 사람의 시체로 부정케 된 사람이나 먼 여행 중이어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배려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유월절은 특정한 날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식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죽음이 우리를 넘어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유월절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결국 희생의 의미를 아는 자만이 참된 이스라엘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출13:9절을 보면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국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고 하신다. 유월절이 율법으로 등장한다. 결국 처음의 율법은 문자가 아니라 유월절 정신이었음이 드러난다 죄인을 위해서 희생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이스라엘의 율법이다.
이스라엘은 희생의 하나님께서 원수 애굽을 치심으로 인도함 받는다. 그리고 이들이 곧 여호와의 처소이고 그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가 된다(출15:17). 결국 성소란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건져낸 무리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모임,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이것이 그들이 지켜야 할 율례이고 율법이다.
출 15:25,26절에서 마라의 원망 사건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6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규례는 유월절밖에 없다. 즉 십계명과 그 외 규례들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을 때인 것이다. 그렇다면 십계명과 그 외 규례들이 주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26절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을 미래에 율법이 주어질 것을 대비해서 미리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십계명 등의 계명이 주어지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지켜야 할 법이 없는가? 이미 유월절이 율법으로 등장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유월절을 기초로 하여 이해해야 한다. 즉 26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계속 유월절의 정신 안에 거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보시고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애굽에 내린 질병은 그들이 여호와의 심판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는 것은 심판 안에 있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료의 결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치료는 유월절 정신에 의해서 주어지고 있다. 이것이 출애굽의 주제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이란 옛 세상과 결별하고 새로운 생명세계의 영향을 받는다 홍해를 건넌 것은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았다는 뜻이 아니라 단절된 생명 세계의 영향력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영향력에 붙들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여호와의 희생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영향력 안에 산다면 그들은 자신의 생존에 대해서는 초월을 해야 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시험하시는데 그것은 칠일에 안식하는 것이다.
출 16:4절에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율법은 무엇인가? 유월절 정신이다. 즉 날마다 비같이 주어지는 양식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희생이 우리를 살린다는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시험이 칠일 때는 거두지 말라는 것이다.
23절에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고 한다. 이스라엘이 칠일 째에 만나를 거두던 것을 중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향력 안에 있음을 알고 생존을 초월했을 때이다.
하나님의 희생이 곧 자신들의 생명임을 알 때 생존을 초월한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원래 존재 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안식이라 한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안식일에 날짜를 지키는 의미가 있을까? 안식일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느냐를 묻는 것이지 날을 잘 지키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이라는 것은 문자화 된 법 하나하나에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속에 흘러오고 있는 정신, 즉 하나님의 희생을 이스라엘에 반영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시내산에서 주어지는 율법과 계명도 이런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율법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지상에 반영되는 점차적인 과정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다. 때문에 율법이 의미하고 있는 정신은 약속의 시작부터 이미 내포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희생을 이스라엘에 반영함으로서 이스라엘을 애굽과 차별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애굽과 차별된 나라, 즉 하나님의 희생이 반영된 나라로서 존재하라는 의미다. 결코 율법을 인간의 의와 노력으로 극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희생이 반영된 이스라엘은 필히 희생의 정신, 즉 자비가 보여져야 한다.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는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있어서는 안된다. 강자와 약자의 힘의 원리로 존재하는 애굽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란 공동체는 하나님의 희생의 원리로 지탱되어야 한다. 이 구원의 은혜를 십계명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과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구원의 은혜 안에서 희생의 원리로만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계명의 항목 하나하나를 실천하라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미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도 자질도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룩한 율법을 극복하도록 요구하고 기대한다는 것은 모순만 드러낼 뿐이다.
말씀에 대한 극복은 인간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하신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두 돌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을 주실 때 처음에는 하나님이 산 위에서 직접 돌판을 만들어 주신다. 이것은 산 위의 거룩과 산 밑의 비거룩과의 화해과 말씀의 관계 속에서 시도됨을 보여준다. 처음 창조된 인간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그 돌판은 산 밑의 비거룩의 존재들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깨어진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언약 밖의 존재로 밀려날 위기에 빠지게 되고, 이스라엘 스스로 말씀을 극복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합으로 이끌어 낼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돌판은 모세에게 직접 제조하도록 명령하신다(신10:1). 그리고 돌판과 함께 언약궤를 만들라고 하신다.
두 번째 돌판을 모세에게 제조토록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율법을 극복할 자질이 없는 이상 하나님이 다시 돌판을 만들어서 주신다고 해도 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세에게 돌판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돌판을 언약궤에 넣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극복하지 못한 죄의 책임을 땅에서 누군가가 해결하는 방식으로 은혜를 지속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신다. 그 해결 방식이 희생이다.
돌판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준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율법은 그리스도의 시대가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며 심판 받을 죄인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희생을 바라보도록 하는 역할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인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희생만 의지하고 산다면 그것이 곧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실천하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지 말씀에 대한 동적인 실천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가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희생을 의지할 자는 자기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포기할 때이다. 율법이 이 기능을 가지고 주어졌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완성의 때를 지향하고 있으며 율법의 완성자가 등장함으로 율법의 기능과 역할도 마감되는 것이다.
새시대는 그리스도의 행함으로 율법이 완성된 시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서는 율법은 살아있지 않으며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예수님 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고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의 희생을 드러내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마감된 율법을 다시 끄집어 내어서 윤리적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며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의 의를 바라보는 믿음의 모습이 아니며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비 복음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고 한 것이다. 또한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오실 것이라고 하였다 (갈3:19).의를 나타내는 것은 어떤 행위나 지킴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가치만 드러내는 것의 의다.
그리스도의 가치는 율법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법적인 규칙 준수나 윤리 도덕이 그리스도의 가치를 드러낼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죄를 모르면서 피만 내세우는, 즉 흠없는 피에 대한 모독이며 피를 단지 면제부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 신자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인식하며 그리스도의 피에 감사하는 것이 최고의 의다. 이 의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다(롬3:21).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실천을 의미하지도 않고 법준수를 뜻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우리의 힘과 노력과 실천으로 되어지지 않고 할 수 없는 것 앞에 굴복이다.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죄의 인식이기 때문에 철저한 죄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되어짐을 알고 자기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믿음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행함이 되어야 한다. 자기 행위를 포기하라는 말을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의 의에 있지 못하고 법적인 실천에 매어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에게는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믿음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 믿음에 접근하고자 하고 믿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의식과 지킴 등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은혜에 전혀 눈을 두고 있지 않고 있는 결과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는 ‘하라’는 명령 때문에 실천하지 않는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안에 있고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랑이 역사함으로서 하는 것이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 소유화하려고 한다. 믿음도, 사랑도 ,성령도 소유화해서 행함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인간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믿음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인간을 소유한다.
믿음은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믿음의 흔적들이 보여질 분이다. 사랑 역시 인간이 소유할 성질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스릴 때 우리에게서 사랑의 흔적들이 나타날 뿐이다.
성령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 인간을 소유하여 다스린다. 영원한 생명 역시 인간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영향력 안에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몇몇 규칙을 새롭게 만들어 놓고 규칙 준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가?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지키라, 행하라는 말을 한 것은 신약에서 신자다운 새 법적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역사하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사는 삶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깨우치고 확인시키기 위함이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의 실체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는 인간의 의를 삭제하는 것이지 결코 세워 가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죄의 인식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