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에 의한 생명의 현상은 진리가 적용된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지 어느 특정한 신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개인이 흔히 목격할 수 없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진리에 의해서 모든 성도에게 나타나는 생명의 현상이 아니라면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암에 걸린 사람이 기도를 해서 나았다고 하자. 분명 개인적으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확실한 체험이라고 해도 진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대로 진리에 의한 보편적인 생명의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체험을 진리에 의한 생명의 현상으로 간주한다면 결국 동일한 체험이 없는 사람은 생명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결국 구원의 여부가 보편적이지 않는 체험이 기준 되어 판단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보편적인 생명의 현상보다는 개인적인 특별한 체험에 더 심취해 있는것 같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생명의 현상 안에서는 ‘남과 다른 믿음’이라는 즐거움과 쾌감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만 소유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우월감을 갖기도 하고 존재의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너에게는 없는 것이 나에게 있고,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으로 상대방보다 더 낫다는 우월감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과 동일한 믿음의 현상 안에서는 이러한 우월감을 누릴 수가 없다. 때문에 자신의 특별함을 보여줌으로써 신앙적 우월감을 누리기 위해 남들에게 없는 독특한 체험을 갖고자 하는 것이고, 이것이 현대 교인을 개인적 체험에 심취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는 반대로 타인에게 있는 체험이 자신에게는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함으로 인해서 타인과 동일한 체험을 하고자 애쓰기도 한다. 사람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우월감을 누리기도 하지만 타인이 소유한 것을 자신이 소유하지 못했을 때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과 동일하거나 아니면 더 나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발버둥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들이 현대 교인들로 하여금 보편적 생명의 현상보다는 개인적 체험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이다. 보편적 생명의 현상으로는 자기 확인을 할 수 없다고 여기기에 독특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자기 확인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을 자극하면서 성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성령 집회’ ‘내적치유집회’ ‘은사집회’ 등이다. 이 집회들의 공통점은 성령 받음의 증거를 방언과 병고침 등의 체험으로 강조하면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있다.
하지만 성령 받음의 증거가 과연 그러한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가? 보편적 현상이 아닌 것을 성령 받음의 증거라고 한다면 동일한 체험이 없는 자는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방언과 병고침 등의 체험을 성령 충만으로 구분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만약 성령 받음과 성령 충만을 구분하여 말한다면 결국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보다는 믿음의 수준이 더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은 믿음이 더 강한가?
신비한 체험으로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들은 구름 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는 체험을 했고, 홍해가 갈라지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체험을 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의 체험들도 그들을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지를 못했다. 놀라운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먹었던 것 때문에,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했다. 모세와 엘리야도 봤다. 교회가 신비한 성령의 체험을 얘기하지만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을 보게 된 체험보다 신비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체험을 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하게 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체험이 성령 충만의 결과라면 말이다.
체험은 신앙의 대상도 증거물도 될 수 없다. 누구라도 체험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마음이 있다면 그는 그 어떤 체험도 신비한 것으로 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기적이 십자가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보다 더 놀랍고 신비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사망에 처한 죄인이 생명으로 옮긴바 되었다는 것도, 산을 바다에 빠뜨리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다. 산을 바다에 빠뜨리는 권능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 사망에 처한 자를 생명으로 옮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6:4). 참된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신앙의 현상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의 괴수이며 십자가의 공로 없이는 단 한치의 소망도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성령의 권능이다. 신자가 자신에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을 신비한 기적으로 보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체험을 좇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자는 자기 체험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즉 자기 체험을 증거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이 신자란 것이다.
그런데 현대 교인은 예수님이 하신 일, 즉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만족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자기 체험이라고 하면서 어떤 감동과 진동, 또는 방언과 병고침, 그리고 가슴의 뜨거움 등을 체험함으로써 자기 확신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 욕망에 불과할 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불신앙의 증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음이 없기에 주관적인 자기 체험을 믿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 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이룰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이란 사실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그래서 진리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제부터는 세상의 어떤 힘도 또한 나에게 있는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가 적용된 신자에게 필히 있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현상인 것이다. 이것만이 참된 성령 체험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심으로만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한 체험, 즉 병고침이나 방언 등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것들이 있든 없든 신자가 할 일은 나를 생명에 있게 하신 분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고, 자랑하며 높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체험을 얘기하고 증거하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신자는 자기 체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신비하고 기적의 사건을 믿는다. 이 믿음이 곧 성령이 함께한다는 증거물이다.
가령 암에 걸린 사람이 기도를 해서 나았다고 하자. 분명 개인적으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확실한 체험이라고 해도 진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대로 진리에 의한 보편적인 생명의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체험을 진리에 의한 생명의 현상으로 간주한다면 결국 동일한 체험이 없는 사람은 생명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결국 구원의 여부가 보편적이지 않는 체험이 기준 되어 판단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보편적인 생명의 현상보다는 개인적인 특별한 체험에 더 심취해 있는것 같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생명의 현상 안에서는 ‘남과 다른 믿음’이라는 즐거움과 쾌감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만 소유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우월감을 갖기도 하고 존재의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너에게는 없는 것이 나에게 있고,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으로 상대방보다 더 낫다는 우월감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과 동일한 믿음의 현상 안에서는 이러한 우월감을 누릴 수가 없다. 때문에 자신의 특별함을 보여줌으로써 신앙적 우월감을 누리기 위해 남들에게 없는 독특한 체험을 갖고자 하는 것이고, 이것이 현대 교인을 개인적 체험에 심취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는 반대로 타인에게 있는 체험이 자신에게는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함으로 인해서 타인과 동일한 체험을 하고자 애쓰기도 한다. 사람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우월감을 누리기도 하지만 타인이 소유한 것을 자신이 소유하지 못했을 때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과 동일하거나 아니면 더 나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발버둥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들이 현대 교인들로 하여금 보편적 생명의 현상보다는 개인적 체험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이다. 보편적 생명의 현상으로는 자기 확인을 할 수 없다고 여기기에 독특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자기 확인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을 자극하면서 성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성령 집회’ ‘내적치유집회’ ‘은사집회’ 등이다. 이 집회들의 공통점은 성령 받음의 증거를 방언과 병고침 등의 체험으로 강조하면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있다.
하지만 성령 받음의 증거가 과연 그러한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가? 보편적 현상이 아닌 것을 성령 받음의 증거라고 한다면 동일한 체험이 없는 자는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방언과 병고침 등의 체험을 성령 충만으로 구분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만약 성령 받음과 성령 충만을 구분하여 말한다면 결국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보다는 믿음의 수준이 더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은 믿음이 더 강한가?
신비한 체험으로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들은 구름 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는 체험을 했고, 홍해가 갈라지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체험을 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의 체험들도 그들을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지를 못했다. 놀라운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먹었던 것 때문에,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했다. 모세와 엘리야도 봤다. 교회가 신비한 성령의 체험을 얘기하지만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을 보게 된 체험보다 신비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체험을 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하게 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체험이 성령 충만의 결과라면 말이다.
체험은 신앙의 대상도 증거물도 될 수 없다. 누구라도 체험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마음이 있다면 그는 그 어떤 체험도 신비한 것으로 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기적이 십자가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보다 더 놀랍고 신비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사망에 처한 죄인이 생명으로 옮긴바 되었다는 것도, 산을 바다에 빠뜨리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다. 산을 바다에 빠뜨리는 권능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 사망에 처한 자를 생명으로 옮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6:4). 참된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신앙의 현상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의 괴수이며 십자가의 공로 없이는 단 한치의 소망도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성령의 권능이다. 신자가 자신에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을 신비한 기적으로 보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체험을 좇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자는 자기 체험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즉 자기 체험을 증거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이 신자란 것이다.
그런데 현대 교인은 예수님이 하신 일, 즉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만족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자기 체험이라고 하면서 어떤 감동과 진동, 또는 방언과 병고침, 그리고 가슴의 뜨거움 등을 체험함으로써 자기 확신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 욕망에 불과할 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불신앙의 증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음이 없기에 주관적인 자기 체험을 믿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 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이룰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이란 사실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그래서 진리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제부터는 세상의 어떤 힘도 또한 나에게 있는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가 적용된 신자에게 필히 있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현상인 것이다. 이것만이 참된 성령 체험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심으로만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한 체험, 즉 병고침이나 방언 등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것들이 있든 없든 신자가 할 일은 나를 생명에 있게 하신 분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고, 자랑하며 높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체험을 얘기하고 증거하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신자는 자기 체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신비하고 기적의 사건을 믿는다. 이 믿음이 곧 성령이 함께한다는 증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