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의 강단에서 남발되는 말 가운데 ‘만사형통’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이 원하고 목적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형통’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갈급해하는 소원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염려하고 고민하며 근심하는 모든 것이 인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만사가 형통하기만 한다면 염려와 고민과 걱정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사형통은 결코 현실로 나타날 수 없으며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현실적으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원하고 목적하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 자신이 원하고 목적하는 것을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사가 형통한다는 것은 듣기 좋은 말일 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가 청중들을 이러한 환상으로 몰아 넣는다. 영원한 생명을 지향해야 할 믿음을 현세의 형통이라는 말도 안되는 환상을 지향하는 믿음 아닌 믿음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만사형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통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믿음 좋은 사람들의 뜻을 성취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결코 개인의 뜻과 목적이 성취되는 만사형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기독교 신앙이 세상에서의 형통을 지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현대 기독교의 신앙형태는 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믿음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대로만 살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목적이 이끄는 삶’(릭 워렌)이나 ‘긍정의 힘’(오스틴)과 같은 서적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필독서로 변모되어 권장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과연 신자를 ‘만사형통’으로 이끌어 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러한 형통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믿으면 형통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 필자의 이러한 말이 개인의 복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반발심이 일어난다면 조용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이 과연 현세의 복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그러한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신자가 아니다.
형통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예로 들지만 그것이 현대 기독교가 말씀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왜냐하면 요셉의 형통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 39: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23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는 말을 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만 중요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형통’의 의미는 세상에서의 형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여호와가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성공한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긴 하였지만 어쨌든 애굽 왕인 바로의 신하다. 그렇다면 누가 더 복을 받았으며 형통한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정말 세상에서의 형통의 복을 주신 것이라면 이왕이면 국무총리가 아니라 애굽의 왕이 되게 했어야 맞지 않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다.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서 꿈을 꾼 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고, 유다의 개입으로 인해서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으나 미디안 사람 상인에게 팔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인가?
또한 요셉이 보디발의 신임을 받아서 그의 가정총무가 되긴 하였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종으로 팔린 요셉이 주인의 신임을 받아 가정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요셉은 형들로 인해 종의 신분이 되어 타국에서 고생을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통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다. 그리고 역시 옥에서도 간수장의 신임을 받아 옥중의 죄수를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것 역시 옥에 갇힌 당시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있던 것에 비하면 형통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심하게 꼬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러한 요셉을 두고 형통한 것으로 말한다.
이렇게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갈수록 꼬여만 갔는데도 불구하고 종이지만 가정총무가 되었고, 옥에 갇혔지만 죄수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서 편하게 지냈으니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신다고 해도 과연 형통의 복으로 간주하며 기뻐할지 묻고 싶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다는 의미는 창 45:4-8절의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는 구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계셨음을 깨닫는다. 꿈을 꾼 것이나 형들에 의해서 상인들에게 팔린 것 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야곱과 형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결국 요셉에게 있어서 형통이란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 자체가 신자에게는 형통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이라면 그 삶은 분명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형통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형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가치없게 보기 때문이다.
신자는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어코 자기 백성을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의 삶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고난과 고통이 계속되는 현실이라고 해도 신자가 믿을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고난과 고통을 동원하여 나를 생명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가 이것이 진정한 현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사형통을 말하는 현대 기독교는 분명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에 가치를 두지 않고 세상의 형통에 가치를 두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피를 값없게 여기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타인보다 형편이 나아진 것을 가지고 형통이라고도 복받았다고도 말할 수가 없다. 신자의 참된 복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형편이 나아진 것을 형통한 것으로, 복받은 것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 밖에 안된다. 이것은 결국 형편이 나아진 것으로 인해 오히려 저주에 이를 자임이 증거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고 성경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십자가보다는 돈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기 때문에 만사형통이라는 말이나 ‘믿는자에게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는 말이나 ‘믿으면 복받는다’는 말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경의 바른 해석이다. 청중들의 귀를 만족시켜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계시하시는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없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만사형통은 결코 현실로 나타날 수 없으며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현실적으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원하고 목적하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 자신이 원하고 목적하는 것을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사가 형통한다는 것은 듣기 좋은 말일 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가 청중들을 이러한 환상으로 몰아 넣는다. 영원한 생명을 지향해야 할 믿음을 현세의 형통이라는 말도 안되는 환상을 지향하는 믿음 아닌 믿음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만사형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통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믿음 좋은 사람들의 뜻을 성취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결코 개인의 뜻과 목적이 성취되는 만사형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기독교 신앙이 세상에서의 형통을 지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현대 기독교의 신앙형태는 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믿음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대로만 살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목적이 이끄는 삶’(릭 워렌)이나 ‘긍정의 힘’(오스틴)과 같은 서적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필독서로 변모되어 권장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과연 신자를 ‘만사형통’으로 이끌어 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러한 형통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믿으면 형통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 필자의 이러한 말이 개인의 복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반발심이 일어난다면 조용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이 과연 현세의 복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그러한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신자가 아니다.
형통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예로 들지만 그것이 현대 기독교가 말씀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왜냐하면 요셉의 형통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 39: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23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는 말을 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만 중요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형통’의 의미는 세상에서의 형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여호와가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성공한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긴 하였지만 어쨌든 애굽 왕인 바로의 신하다. 그렇다면 누가 더 복을 받았으며 형통한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정말 세상에서의 형통의 복을 주신 것이라면 이왕이면 국무총리가 아니라 애굽의 왕이 되게 했어야 맞지 않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다.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서 꿈을 꾼 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고, 유다의 개입으로 인해서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으나 미디안 사람 상인에게 팔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인가?
또한 요셉이 보디발의 신임을 받아서 그의 가정총무가 되긴 하였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종으로 팔린 요셉이 주인의 신임을 받아 가정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요셉은 형들로 인해 종의 신분이 되어 타국에서 고생을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통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다. 그리고 역시 옥에서도 간수장의 신임을 받아 옥중의 죄수를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것 역시 옥에 갇힌 당시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있던 것에 비하면 형통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심하게 꼬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러한 요셉을 두고 형통한 것으로 말한다.
이렇게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갈수록 꼬여만 갔는데도 불구하고 종이지만 가정총무가 되었고, 옥에 갇혔지만 죄수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서 편하게 지냈으니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신다고 해도 과연 형통의 복으로 간주하며 기뻐할지 묻고 싶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다는 의미는 창 45:4-8절의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는 구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계셨음을 깨닫는다. 꿈을 꾼 것이나 형들에 의해서 상인들에게 팔린 것 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야곱과 형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결국 요셉에게 있어서 형통이란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 자체가 신자에게는 형통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이라면 그 삶은 분명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형통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형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가치없게 보기 때문이다.
신자는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어코 자기 백성을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의 삶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고난과 고통이 계속되는 현실이라고 해도 신자가 믿을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고난과 고통을 동원하여 나를 생명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가 이것이 진정한 현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사형통을 말하는 현대 기독교는 분명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에 가치를 두지 않고 세상의 형통에 가치를 두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피를 값없게 여기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타인보다 형편이 나아진 것을 가지고 형통이라고도 복받았다고도 말할 수가 없다. 신자의 참된 복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형편이 나아진 것을 형통한 것으로, 복받은 것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 밖에 안된다. 이것은 결국 형편이 나아진 것으로 인해 오히려 저주에 이를 자임이 증거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고 성경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십자가보다는 돈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기 때문에 만사형통이라는 말이나 ‘믿는자에게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는 말이나 ‘믿으면 복받는다’는 말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경의 바른 해석이다. 청중들의 귀를 만족시켜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계시하시는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없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