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가 주말에는 바쁜 관계로 질문에 답을 드릴 겨를이 없어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질문하신 구절은 그 구절만 가지고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앞의 내용까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최대한 줄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는데, 육체의 고난이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의 죽으심을 육체의 고난을 표현하는가 하면 인간의 육체는 곧 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죄가 육체로 드러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육체를 위해 살아갑니다. 육체의 즐거움을 위하고 좀 더 가치 있는 육체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인생의 방향이고 목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육체로 죽으신 것이고, 그것을 육체의 고난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육체는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참여된 사람입니다. 그 말은 예수 안에서의 신자의 육체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육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육체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 받았습니다’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안에서 ‘나의 육체는 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까지 따라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우상숭배,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육체를 위해 사는 모든 인간이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우상숭배를 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게 된 신자에게는 더 이상 자기 육체가 목적이 되는 삶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예수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2절에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기 육체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예수께 속한 육체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 속한 육체로 사는 것을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뜻에는 도덕적인 삶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자기 영광을 위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신자의 육체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할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이 우리로 말미암아 죽으셨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신자의 육체의 용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자가 예수를 믿는다 해도 여전히 발산되고 있는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우상숭배, 즉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현실들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으셨는가를 증거 하는 증거물로 활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자’이며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신자는 자기 육체로 인해서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의 현장인 십자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피의 희생으로 인해 존재하는 은혜를 알아가고 예수님의 공로만 높이고 자랑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할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었다면 사람이 달라져야 하고, 좀 더 나은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 육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에게 뜻을 두고 살아가는 이방인의 삶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육체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육체는 죄를 알게 하고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인 자임을 드러내는 증거물이라는 말을 한다면 알아들을까요?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오로지 자기 육체를 목적으로 하는 이방인의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하는 복음이 던져진다면 거부하고 배척하면서 오히려 비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하나님께 자신들이 심판받을 자임을 직고 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본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4,5절의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잘 이해하시면 6절의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는 내용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복음으로 인해서 자기 육체를 목적으로 하고 자기 육체를 믿고 살아가는 자가 곧 저주 아래 있음이 확정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게 되면 자기 육체를 보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깨닫게 되고, 육체는 믿을 것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됩니다.
육체로 행하는 어떤 것도 의가 될 수 없고, 오로지 저주 아래 있는 자로 보게 될 뿐입니다. 즉 자기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육체의 고난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육체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것이고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심판의 존재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를 수준 높은 육체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 되게 하는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따라 살게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육체에서 죄를 보게 되고, 자신이 저주의 존재임을 육체로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나같은 자를 생명에 있게 하신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주말에는 바쁜 관계로 질문에 답을 드릴 겨를이 없어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질문하신 구절은 그 구절만 가지고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앞의 내용까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최대한 줄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는데, 육체의 고난이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의 죽으심을 육체의 고난을 표현하는가 하면 인간의 육체는 곧 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죄가 육체로 드러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육체를 위해 살아갑니다. 육체의 즐거움을 위하고 좀 더 가치 있는 육체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인생의 방향이고 목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육체로 죽으신 것이고, 그것을 육체의 고난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육체는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참여된 사람입니다. 그 말은 예수 안에서의 신자의 육체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육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육체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 받았습니다’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안에서 ‘나의 육체는 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까지 따라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우상숭배,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육체를 위해 사는 모든 인간이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우상숭배를 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게 된 신자에게는 더 이상 자기 육체가 목적이 되는 삶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예수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2절에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기 육체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예수께 속한 육체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 속한 육체로 사는 것을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뜻에는 도덕적인 삶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자기 영광을 위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신자의 육체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할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이 우리로 말미암아 죽으셨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신자의 육체의 용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자가 예수를 믿는다 해도 여전히 발산되고 있는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우상숭배, 즉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현실들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으셨는가를 증거 하는 증거물로 활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자’이며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신자는 자기 육체로 인해서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의 현장인 십자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피의 희생으로 인해 존재하는 은혜를 알아가고 예수님의 공로만 높이고 자랑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할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었다면 사람이 달라져야 하고, 좀 더 나은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 육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에게 뜻을 두고 살아가는 이방인의 삶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육체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육체는 죄를 알게 하고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인 자임을 드러내는 증거물이라는 말을 한다면 알아들을까요?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오로지 자기 육체를 목적으로 하는 이방인의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하는 복음이 던져진다면 거부하고 배척하면서 오히려 비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하나님께 자신들이 심판받을 자임을 직고 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본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4,5절의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잘 이해하시면 6절의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는 내용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복음으로 인해서 자기 육체를 목적으로 하고 자기 육체를 믿고 살아가는 자가 곧 저주 아래 있음이 확정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게 되면 자기 육체를 보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깨닫게 되고, 육체는 믿을 것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됩니다.
육체로 행하는 어떤 것도 의가 될 수 없고, 오로지 저주 아래 있는 자로 보게 될 뿐입니다. 즉 자기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육체의 고난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육체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것이고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심판의 존재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를 수준 높은 육체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 되게 하는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따라 살게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육체에서 죄를 보게 되고, 자신이 저주의 존재임을 육체로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나같은 자를 생명에 있게 하신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