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2.01 21:37

(74강) 신앙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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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20-24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1202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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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0-24 개정)

 

 

<설교>

 유대인과 이방인

 

이방인이라 함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써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인 자신들 외의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으로 부르면서 무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독교 역시 예수 믿기를 거절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대인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 다니며 예수 믿는 우리는 천국가지만 예수 믿지 않는 너희는 모두 지옥 간다’는 시각으로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율법을 내려주신 민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하였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스스로 지칭하는 그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한 멸망의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까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율법을 받은 사람이고, 율법을 지켜 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근거 삼아서 자신들 외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없다는 고집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착각의 세계가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세태인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신자가 영접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받으신 분입니다. 저주의 죽음이라 함은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의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대표자로 저주의 잔을 마셨고, 하나님은 아들의 순종을 통하여 생명의 나라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그들만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여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나는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19절의 끝에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처럼 믿음 역시 그 행한 일로 인하여 그 믿음의 옳음이 증거되도록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행함이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그것은 음식을 먹을 때는 손을 씻는 등,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부정한 자로 취급되는 세리나 죄인들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고, 세리나 죄인들과도 함께 하심으로써 유대인들로부터 ‘먹기를 탐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는 비방과 함께 배척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의 믿음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도 비록 스스로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믿음의 의미를 모른 채 유대인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로 살고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이 보실 때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그 기록 순서가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령 본문의 얘기는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와 변화산의 사건 다음에 70인의 제자를 파송하실 때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에서는 씨뿌리는 비유나, 변화산의 얘기가 등장하기 전에 본문의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복음서는 역사적인 순서는 무시한 채 저자가 증거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서 사건이 배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 사상과 종교적인 사고의 잘못됨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참된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데 그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마태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여러 사건들을 역사적인 순서와 상관없이 자신이 증거하고자 하는 주제 안으로 모아서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가 이런 사건들을 모아서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1장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절)라고 질문 한 것으로 시작하여 지난 주 말씀드린 아이들의 장터 놀이 비유까지 한결같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자신들의 종교와 맞지 않고 함께 어울리지도 않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 세상의 세태라는 것에 대해 지적을 하셨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세태에 대한 책망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의아하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을 책망하기 위해 비교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지역이 두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멸망의 자식으로 여기는 이방인들이고, 더구나 소돔은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받은 악한 땅입니다. 그런데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그리고 소돔 땅이 더 견디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왜 이런 책망을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20,21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의 권능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는 증거의 권능이었는데, 정작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다고 해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기에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라신이라는 지역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벳새다에서는 오병이어의 권능을 행하시고(눅 9:10) 소경을 고치신 일(막 8:22)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고, 베드로의 장모와 중풍병자 그리고 많은 귀신들린 자와 병자를 고쳐주시는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을 보고서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책망의 이유입니다.

 

 

 

 권능을 보고 해야 할 회개는

 

그러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을 본 유대인이라면 회개했어야 그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라는 뜻인데 과연 권능을 보고서 어떤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권능이 회개한다면, 결국 예수님은 권능을 행하심으로써 유대인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책망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은 거의가 문둥병자와 귀신들린 자, 그리고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는 저주받을 자로 분류되어서 배척을 받고 유대사회에 함께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 조차도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고쳐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 때문에 예수님의 메시아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권능을 행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어둠에 갇힌 자들에게 빛으로 오신 생명의 주라는 것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즉 참된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굳게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어둠에 갇힌 자기 백성을 구출하고 그들에게 생명이 되어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어둠에 갇힌 존재임을 아는 자이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는 것을 권능을 행하신 것으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어둠에 갇힌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참된 선민으로 여겼기 때문에 권능을 보고서 회개하기는커녕 세리와 죄인들에게 함께 하신 예수님을 비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1절),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23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율법을 받은 자라는 조건 또한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구원에 대한 자기 조건과 자기 원칙, 그리고 자신의 종교세계에 묻혀 있지 않은 자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회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회개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어둠에 갇혀 있으면서 어둠의 백성임을 몰랐던 것, 그리고 자신의 도덕과 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했던 이런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신자라면,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고 문둥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는 권능을 보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여긴 것이 교만이고 착각이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자신은 저주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 본질 위에서 주를 바라보지 않음으로 사람에 대한 차별과 구별이 나오게 되었음을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신앙이란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은 단순히 병을 고쳐주시는 기적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나 귀신들린 자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편견이나 구별과 차별을 초월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어둠에 갇힌 우리에게 생명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예수님의 이 사랑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이고, 신자는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이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는 이 사랑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편견과 구별과 차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그 사랑이 여러분을 어둠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얽히기 쉬운 그 어떤 인간관계에도 얽히지 않은 사랑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자존심과 체면과 고집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사랑입니다. 신자는 바로 예수님의 이 사랑에 의해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권능을 행하심으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을 보면서 내의 자존심과 체면과 고집으로 뭉쳐 있는 자신을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는커녕 훼방하는 훼방자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의 권능을 알고 깨달은 신자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자각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회개가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말씀을 들을 자이지 자신이 아는 말씀을 토대로 누군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율법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저주받을 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율법을 잘 안다고 하는 그들이야 말로 율법에 무지한 사람들이었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그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이고 위로고 힘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를 판단하는 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나의 무능과 악함을 보게 하면서 항상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복음 앞에는 들을 자로 서게 되는 것이고,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우리가 살면서 겪는 아픔과 상처가 다스려지고 덮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목사라고 해서, 장로라고 해서, 판단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이기 때문에, 또 교회를 오래 다녔고 장로고 집사라는 것 때문에 말씀을 듣기 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말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판단자의 자리에 있으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자신에게서 보인다면 ‘과연 나는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 앞에 회개한 자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의 길을 가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신자 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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