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2.08 21:18

(75강) 아버지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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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25-27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1252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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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5-28 개정)

 

<설교>

 믿음에는 천재가 없다.

세상에는 여러 분야에서 천재로 불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리학의 천재, 음악의 천재, 수학의 천재 등등 한 분야에서 일반사람보다 뛰어난 기량을 보이면 우린 그를 천재라고 합니다. 가령 초등학생의 나이에 대학교 수학 문제를 푼다거나 대학교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세상은 그를 천재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믿음에도 천재가 있을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믿음의 문제에서 천재로 불리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믿음에는 천재가 없는가 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대학교 수학을 풀면 세상은 그를 천재라고 하면서 깜짝 놀랄 것입니다. 반면 나이가 20, 30이 된 사람이 1+1도 모르면 세상은 그를 바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천재입니까? 대학생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바보입니까?

 

 

만약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성경을 읽고 줄줄 해석을 한다면 신학자들은 그를 신학의 천재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천재는 아닙니다. 아니 믿음에는 아예 천재 둔재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치원 아이도 예수를 믿을 수 있고,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지식을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에 믿음에서만큼은 천재와 둔재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박사가 예수를 믿는 것과, 유치원 아이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분이고, 예수님의 피가 나를 죄를 용서했음을 믿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 유치원 아이에게 있든, 신학박사에게 있든 믿음은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신학박사이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아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믿는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뿐이고, 실상 믿는 것은 자신의 신학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유치원 아이가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과, 성경과 신학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의 수준은 분명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어부였던 베드로가 기록한 성경과, 당시 지식인이었던 사도바울이 기록한 성경이 그 문장이나 깊이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나 사도 바울의 믿음은 동일하기에 차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지식수준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나타내셨고, 그 복음을 믿게 하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예수를 믿는 것도, 신학박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나타내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 믿음의 방해물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절)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6,27절)는 말씀들이 믿음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우리의 지혜나 지식에 의한 것도 아니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아버지가 나타내주시고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알 수 없는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아담의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완전 무지합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하신 말씀대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베푸셔야만 아들을 알게 되고, 아들을 앎으로써 아버지를 알게 되며 구원에 참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12:3)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신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들의 소원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짐으로 인해서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들을 주로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을 잘 알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는 믿음이 당연한 것이고, 평소 행실이 나쁜 사람에게 믿음은 성령의 역사와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세다, 가버나움에서 권능을 행하였으나 회개하지 않는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능을 행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저주와 어둠에 갇힌 자들에게 빛으로 생명으로 오셨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권능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저주와 어둠에 갇힌 자임을 알고 회개를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저주에 갇힌 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빛에 있는 존재로 여겼고, 그래서 빛과 생명으로 오신 메시야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한 그들은 메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과 사고로 굳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로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지혜는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시각으로 볼 때 세리나 죄인들은 지혜가 없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주를 좇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었고 그래서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산다고 여기는 자신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숨기셨다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25절에서 말씀한 ‘이것’이란 유대인들이 멸망의 자손으로 일컫고 있는 이방인들이 오히려 회개하게 되는 생명의 역사를 뜻합니다. 이처럼 생명의 역사는 유대인들의 생각과 상식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볼 때는 도무지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고, 반면에 이미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되었다고 의심 없이 믿고 있는 자들이 영원한 어둠에 갇히게 된다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벌리시는 생명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생각을 모두 무너뜨리시고 하나님만의 독자적인 뜻을 앞세워서 택한 자들에게만 생명을 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고 아버지를 아는 신자라면, 아버지 앞에서는 당연히 지혜가 없고 슬기롭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신자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믿음에 방해물은 다름 아닌 지혜와 슬기라는 결론이 됩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와 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인간은 무엇을 해도 자발적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저주의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인간의 지혜와 슬기야 말로 믿음의 방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철저하게 숨겨져서 알 수 없는 비밀일 수밖에 없습니다.

 

 

 믿음은 신자를 어린아이로 만든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믿음은 신자를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을 보면서 그 권능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충분할 뿐이고, 우리가 행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보탬이 되지를 못하고 쓸모없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면서 인간의 악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지식과 상식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다만 인간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는가에 몰두할 뿐입니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이 개척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수준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란 다만 아버지가 행하는 일을 바라보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통해서 아버지가 위대하다고 외칠 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신자를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열심히 행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자’는 것은 믿음의 말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의 지혜와 슬기를 고집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은 철저하게 숨겨져서 알 수 없는 비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사건에서는 아버지가 일하시고 아들이 일하고 계실 뿐 인간이 일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열심히 일해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자’라고 나서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사는 것을 슬기로운 삶으로 간주합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인간의 상식이지만, 이 상식이 무너지기 전에는 아버지의 일을 볼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세상의 상식이나 과학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일이 많이 등장합니다.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부터 남녀 간의 정상적인 관계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는 것이나, 완전하게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했다는 것이나, 예수님이 물고기 다섯 마리와 조그마한 떡 다섯 개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등의 기적의 사건들 하나하나가 세상의 상식과 과학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내용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그런 일들을 믿으면서 성경을 진리라고 붙들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하기 일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고, 따라서 성경은 어떤 사건을 잔뜩 부풀려 놓은 과장된 이야기로 가득한데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대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반발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간에게 상식으로 구축되어 있는 사고체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시선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인은 기적의 사건들이 비과학적이라며 반발하지만,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된다며 반발을 합니다. 인간의 선과, 실천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 구원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시고, 계시를 받은 자외에는 아버지를 알 수 없게 하신 아버지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를 똑똑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외향적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믿음은 신자를 어린아이로 만듭니다.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만 바라면서 그 일로 기뻐하는 어린아이가 되게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슬기로 아는 하나님은 착하게 살면 복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상식에 맞습니다. 그런데 착하게 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고통이 주어집니다. 그럴 때 사람은 자기 믿음에 대해 의심을 갖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신자는 착하게 산 것도, 열심히 신앙생활 한 것도 선이 되지 못함을 압니다. 여전히 자신은 죄에 끌려가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보입니다. 죄에 끌려가는 자신을 붙드시면서 끝까지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는 그것으로 신자는 인생의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될수록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만이 아버지를 아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에서만큼은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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