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5.10 18:36

(86강) 비유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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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10-17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3101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0-17)

 

<설교>

 

◎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의 뜻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서 천국 가겠다는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며, 나는 지옥가도 좋으니까 예수 믿지 않겠다는 선택에 의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보내기로 선택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이고, 지옥 보내기로 작정한 사람이 지옥에 가게 됩니다. 즉 천국이든 지옥이든 인간의 자발적 선택과 의지와는 무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롬 9:15,16절에서는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늘의 복을 깨달으며 약속을 받게 된 것도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에서는 장자이면서 약속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 역시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작정은 에서와 야곱이 아직 나기도 전에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과도 무관합니다. 결론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진 것일 뿐입니다.

 

 

현대인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천국으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지옥으로 가는 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상식이며 공평이고, 심판자이신 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식 구조 위에 세워진 현대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가 천국 간다고 말하면서도 십자가를 믿는 것을 인간의 의지와 결단으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잘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이 천국 가는 신자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지옥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간의 이해와 상식을 토대로 생각하지 마시고 성경을 토대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이 인간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결과라는 말이 성경에 부합되는 말이냐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면 앞서 말씀드린 롬 9장의 내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또한 지난 주에 말씀드린 ‘선을 행할 인간은 없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선을 행할 인간이 없다면 인간이 선을 행해서 천국 갈 사람은 없다는 뜻이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어긋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상식 밖의 하나님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는지 묻자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 모여든 큰 무리들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과 허락되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 버립니다. 이처럼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열심과는 무관하며 오직 하나님이 허락한 자인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될 뿐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허락에 의한 것이라면 구원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에게만 베풀어진 은혜가 됩니다. 이것으로 구원을 향한 인간의 모든 노력과 열심은 무의미한 것이고, 오히려 자기의 노력과 열심을 동원하여 구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엉터리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씨가 떨어져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길가 밭, 돌 밭, 가시떨기 밭이 스스로의 힘으로 좋은 밭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며 따라서 교회가‘좋은 밭이 되어서 열매를 많이 맺자’라고 말하는 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드러나는 생생한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좋은 밭이 되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씨가 떨어져서 열매는 맺음으로 인해서 그 땅이 좋은 땅으로 여김을 받습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에도 생명을 가진 씨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어떤 땅에서는 열매를 맺음으로 인해 그 땅이 좋은 땅이라고 드러내는 이 일도 하나님의 허락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이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받습니다’라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구원과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조건 적인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행함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토대가 된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과 거리가 먼 인간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비밀을 세상에 선포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신자를 통해 그 비밀을 드러내심으로써 허락되지 아니한 자들이 말하는 천국에 관한 말들이 모두 헛된 것임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14,15절을 보면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6:9-10절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때 이사야는 자신이 부정한 자임을 알게 되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주의 음성을 듣게 되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화답을 합니다.

 

 

이사야가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하는 그때의 마음은 성전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이 깨닫게 된 인간의 실체와 모든 죄가 사하여진 은혜를 증거하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서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고 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염려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가 가서 할 일은 백성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 듣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사야가 한 그 일을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이고, 이 일을 위해서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 수 없는 말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들만이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에 부합되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상식과 이해에서 벗어나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천국 또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들만이 깨닫고 보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너무 많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취향에 맞는 예수를 우리 멋대로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베풀기 위해 오신 분이고, 그렇다면 이렇게 하실 것이다’는 우리 나름대로의 계산을 가지고 내게 맞는 예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두렵다는 예수님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하시고 더 많이 듣고 깨닫게 해서 천국 보내시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가 맞다면 예수님은 말씀 전파에는 실패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을 설득하기는커녕 스스로를 죽이는 화살로 되돌아 왔기 때문입니다.

 

 

 

◎ 복 있는 자

 

신자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교회를 나왔다고 해서 인정되지 않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된 그들만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씨가 되어 떨어져서 말씀이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여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좋은 땅으로 드러난 그들이 신자이며 예수님의 참된 가족입니다.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에 지나지 않은 자신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는 씨가 떨어져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말씀의 능력입니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 허락된 신자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소망할 것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땅이 되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고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욕망일 뿐입니다. 신자가 소망할 것은 생명력이 있는 말씀이 나 같은 자에게 떨어져서 열매가 맺어지는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부인되고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에 모든 것을 맡기는 예수님의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그 자리에 모인 큰 무리들에게 ‘너희가 다 내 가족 되는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왔다고 예수님의 가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로 모였다고 해서 신자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눈과 귀가 열려서 보고 알 수 있고 듣고 깨닫는 그들이 신자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될수록 많은 사람을 끌어 모아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교회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말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을 교회로 모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나,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이 허락된 자만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이 부인되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높이고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이 신자입니다. 말씀이 떨어져 역사하면서 열매가 맺어진 좋은 땅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을 옥토로 만드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말씀이 갖고 있는 생명의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말씀이 나에게 역사하면서 참된 진리를 따라 살게 하며 구원의 길을 가게 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이 주어졌을 때 알아듣지 못하고 반발하고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눈과 귀가 열려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복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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