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평안하시지요?
언제나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성경을 다시 보게 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어제 성경을 보다가 아내랑 궁금한것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1,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니까 가인에게 표를 주시면서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음을 면하게 하신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담과 하와를 통한 가인과 아벨 말고도 또 다른 사람들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 당시 아담과 하와의 또 다른 자손이거나 친인척간의 결혼이 가능했다면 지금은 왜 친척끼리 결혼이 안 되는지도 궁금합니다.(단순히 유전적인 문제인지요? 아니면 중간에 뭔가 변화가 있었는지요?)
2. 그리고 창세기 7장에 노아 방주에 탄 짐승이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 암수 둘씩인지?
아니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암수 둘씩인지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왜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지?
너무 복잡한 질문이고 두서없이 질문드려서 죄송합니다.
목사님, 늘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또한 아담이 백삼십 세에 셋을 낳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백삼십 세가 되기 전까지 가인, 아벨, 셋만 낳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가인을 낳기 전에도 자식을 낳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직 가인, 아벨, 셋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경은 아담의 자손이 몇 명이며 누구를 낳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에 가인과 아벨 외에 다른 누군가가 존재했는가에 대해서 관심두지 않음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은 세상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아담의 자식으로 가인과 아벨만 언급된다고 해서 그 당시 아담의 자식이 그들 둘 뿐이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담의 자식으로 가인과 아벨이 등장되는 것은 그들을 통해서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죄에 의해 희생당하는 아벨, 그리고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심으로 죄로 인한 희생당한 자리에서 죄를 이기는 생명이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성경이기에 굳이 세상에 누가 존재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아담이 몇 명의 자식을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생각은 ‘성경은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와 현실 상황의 증명, 확인 등으로 성경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믿고자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점입니다. 성경은 ‘이것은 사실이다’는 것으로 인간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생명의 일하심만 증거하며 그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누구인가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척끼리의 결혼 문제, 즉 근친결혼에 대한 것은 인간이 만든 법입니다. 인간이 서로 혼인을 하며 번식 하는 과정에서 근친끼리 결혼을 하면 좋지 않더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 그래서 인간의 우월을 위해 근친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대사회에는 귀족이나 왕족들이 자신들의 우월함을 보존하기 위해 근친결혼을 하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결국 근친결혼을 하던 하지 않던 그것 역시 인간의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아서 인간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죄의 속성이 결혼의 문제에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역시 성경이 무엇을 증거 하고자 하는가에 초점을 두지 않으면 답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창 7:2절에서는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라고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어간 것으로 말하는데, 8,9절에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라고 정결한 짐승이 암수 둘씩 방주에 들어간 것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내용 역시 성경이 증거 하는 것, 즉 저주에 속한 불의한 인간을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셨는가에 초점을 두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각에서만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내용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주에 들어간 정결한 짐승은 2절의 내용대로 암수 일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9절에서 암수 둘씩으로 말한 것은 정결한 짐승의 역할 때문입니다. 방주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부정한 짐승을 방주에 태웠을까? 정결한 짐승만 방주에 있게 하셔서 홍수 후의 세상을 정결한 짐승만 존재하는 깨끗한 세상이 되게 하면 안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정결하다고 한 짐승만 세상에 존재한다고 해서 세상이 정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홍수 후의 세상이 방주로 인해 심판에서 구원받은 노아로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여전히 죄가 등장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착하고 선하고 예의 바르고 인격이 훌륭한 사람만 존재한다고 해서 죄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방주에 있습니다. 그런데 암수 일곱씩 있던 정결한 짐승을 둘씩으로 말함으로써 정결한 짐승을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어 심판을 받음으로써 부정한 것이 구원 받는다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증거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정결한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으로 드러납니다. 죽임을 받아야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인데 정결한 것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통해서 방주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됩니다. 정결한 짐승으로 오신 예수님이 부정한 짐승을 대신해 죽임을 받음으로써 부정한 것이 사는 구원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정결한 짐승의 수에 대한 내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