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8.11 09:59

(72강)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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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3:22-30http://onlycross.net/videos/nuk/nuk-13223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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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설교>

 

◉ 질문의 의도 ◉

예수님이 각 성 마을로 다니며 가르치실 때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질문하는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내용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원 받는 자가 적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면 ‘적다’라든가‘많다’라고 답하시면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의 답변은 질문자의 허를 찌르는 듯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질문자의 질문에 담긴 그 의도와 오류를 간파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질문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의 문제였으며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일단 23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다음에 “그들에게 이르시되”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질문은 ‘어떤 사람’ 즉 한 개인이 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문자 외에 다른 여러 무리들이 함께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질문자와 다른 무리들을 같은 존재로 여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바리새인과 같은 부류들이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실 때 있었던 일이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뒷받침 해주고 있으며, 3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어떤 바리새인이 나와서 예수께 여기를 떠나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이 누구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바리새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면 질문의 의도는 능히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신앙생활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만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할 수 있는 서기관,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일반 백성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기들이야 말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야 말로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는 자가 적습니까’라고 질문한 그 속셈은 무엇일까요? ‘그렇다 너희들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적은 것을 보니 구원을 받을 자가 적다’라는 답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다시 말해서 질문을 통해 자기들의 신앙생활을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 싶어 한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의 답변을 생각해 본다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힘쓰라 ◉

 

예수님은 그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절)는 말씀을 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구원을 받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힘든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기 위해 힘을 써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들어가기를 구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기 때문에 구원을 받고 싶은 마음만 갖고 있지 말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을 철저한 신앙생활로 연결하여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인정하고 그들만이 구원 받을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더군다나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결과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점을 염두에 둔다면 ‘힘쓰라’는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열심과 노력을 촉구하고자 한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기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고 또한 그것이 천국이라면 천국은 또 하나의 경쟁터일 수밖에 없습니다.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실력 좋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대학 입시나 취업처럼 천국도 신앙의 실력이 좋은 사람만 들어가는 곳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천국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앞서 말한 대로 ‘힘쓰라’는 말씀은 우리의 노력과 열심을 촉구하는 의미가 아님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25절의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라는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시지만 집 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우리가 이해하는 힘쓰라는 말의 의미, 즉 노력과 열심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주인은 이미 문을 닫아 버렸고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사정해도 주인은 문을 두드리는 그들을 향해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며 외면합니다.

 

 

예수님은 그럴 때 그들이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절)라고 말하겠지만 여전히 집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27절)고 하며 그들을 외면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부인할 것임을 말씀을 합니다.

 

◉ 두드리는 자의 행악 ◉

 

문을 두드리는 자들을 집 주인과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너희를 모른다고 하자 혹 주인이 자신들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싶었는지 주 앞에서 주와 함께 먹고 마셨던 일, 길거리에서 주께 가르침을 받았던 일들을 말하며 우리가 바로 그들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알지 못한다고 하고 도리어 그들을 행악하는 자들로 규정하고 나를 떠나가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마 7:22-23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행한 일을 자랑스럽게 보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불법을 행한 자로 규정하고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관계를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선지자 일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을 자기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했는데도 관계를 부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에서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로부터 길거리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이 역시 외적으로는 주와 가까운 친분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관계가 부정된다면 주 앞에서 먹고 마시고, 주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일은 주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또한 마태복음의 말씀처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다고 해도 그 역시 주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증거가 아닌 것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와 함께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주의 이름으로 목사 일을 하고 많은 권능을 행했는데 어떻게 주께로부터 그 관계를 부인 당할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저 사람은 누가 뭐래도 주의 백성이고 천국 갈 사람이다’라고 굳게 믿었는데 예수께로부터 너를 모른다고 부인당하고 지옥가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천국의 현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신앙의 열매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이 나타나는 사람들 중에도 얼마든지 예수께로부터 행악하는 자로 여김 받으며 부인 당하고 지옥에 가게 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으로 여겼던 것들이 정작 신앙이 아닐 수 있으며, 신앙의 열매로 보인 것들 역시 신앙의 열매가 아닐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에게 종교적인 선한 열매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기도, 금식, 십일조 등을 선한 열매로 여겼고 그 열매를 근거로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 해당되며 하나님도 자신들을 알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열매를 부인하는 말씀을 하신 것이고 오히려 행악하는 자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악이 무엇일까요? 분명 도덕과 윤리가 기준 된 행악을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하자면 이들의 행악은 주 앞에서 먹고 마시고 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주인이 자신들을 알아주고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행악의 문제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선한 열매를 맺으면 천국에 자신이 이룬 열매, 즉 업적과 함께 이름이 기록된다고 착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보다 자기 노력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행악이 아닐 수 없으며 이것이 곧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가리켜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종교인은 늘 자기 열심과 선행을 앞세워 경건을 가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열심과 선행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열심과 선행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열심과 선행을 신앙의 열매로 간주하고 자신이나 타인의 신앙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천국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좁은 문으로 ◉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 마음이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향해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신의 존재와 모든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놀라운 신비가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열매가 있는 신자는 믿음으로 인한 그 기쁨을 다른 이에게 나눠주기를 소원하며 힘쓰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러한 신자의 삶이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부터 믿음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고, 늘 세상의 삶에 시달리며 기쁨보다는 염려에 묻혀 살아가고 있는 현실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의 길을 외면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복 받고 천국 가는 것에 목적을 두고 교회를 찾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와 여러분을 붙들어 주기를 소원해야 하며, 말씀으로 인해 무엇보다 죄인일 뿐이며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크신 은혜의 기쁨을 알게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세상에 가진 것이 남들보다 적고 없다고 해도 예수님의 은혜로 마음이 부요해질 수 있음을 배우기를 원하고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자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은 여러분께 여러분이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하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역사입니다.

 

 

신자가 이런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주를 찾고 부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님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를 모른다고 하시면서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고 하실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과 예수님이 신앙으로 여기시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인간의 종교성으로 만들어 낸 가짜 신앙을 앞세우며 자기 착각에 빠진 채 멸망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에 의한 신앙은 늘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앞세우고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께 ‘예수님 내가 이런 사람 아닙니까? 천국 문도 열어 주시고 복도 주십시오’라며 자신의 요구를 내어 놓을 뿐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에는 나의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나를 알아 줄 것이라며 내어 놓을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행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행함이 감히 예수님의 피의 은혜 내어 놓을만한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에만 마음을 두고 그 은혜의 분량을 알아가며 은혜로 인한 기쁨과 감사만 있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우리 힘으로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열어 주셔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은 나의 노력과 열심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은혜에만 온 마음을 두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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