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1:17-21http://onlycross.net/videos/co1/co1-111721.mp4
<본문>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설교>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 필히 요구되는 것은 교회가 붙들고자 하는 모든 것이 부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붙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일 것이고, 교회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고자 한다면 참된 교회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대개 교회는 목표를 참된 교회를 만드는 것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행동지침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교인들의 바른 생활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이유가 결국 ‘우리 교회는 참되다’는 것으로 교회를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함인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결국 참된 교회를 명분으로 하여 그것으로 교회를 자랑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속셈입니다. 이것은 분명 십자가만을 자랑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는 참된 교회일까요 거짓 교회일까요? 교회에 드러난 문제만 보면 참된 교회라고 말하기가 곤란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를 거짓 교회라고 말하기도 곤란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두고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문제투성이인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지칭했다는 것은 교회에 있었던 문제가 하나님의 교회되기에 걸림돌이 아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러한 말이 쉽게 납득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문제가 있어도 된다는 말인가?’라는 반발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노력으로 문제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문제없는 참된 교회 만들기’는 인간의 환상일 뿐입니다. 인간의 착한 행실을 참된 교회됨의 조건으로 세우는 것 자체가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결과이며 인간의 선함과 의로움 위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사탄의 발상인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부인하는 거짓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시각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추구하는 교회다운 교회, 건전한 교회, 좋은 교회, 바른 교회를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 그대로 십자가만 자랑됨으로써 영광 받으시는 것에 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과연 벗어날 수 없는 문제를 통해서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할까요?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17-19절)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좋은 교회 되는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파당을 언급하면서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파당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바울의 말대로 파당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드러났다면 파당이 하나님의 사람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는 도구였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교회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드러나기 위해서 파당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교회에 파당이 필요하다 필요 없다’는 여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파당이라는 것이 교회의 필요에 따라 사람이 만들거나 만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파당은 사람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과 유익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이 있는 곳에는 자연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있는 곳에 파당은 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파당은 인간이 둘만 있어도 존재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자기중심이고 자기편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 편이고 여러분도 각각 자기편입니다. 이것 자체가 이미 우리사이에는 파당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파당이 제각기 이념과 생각에 따라 뭉치게 되면서 힘을 가진 세력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당은 교회 밖의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편인 사람들로 모이는 교회에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파당이 없는 교회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설령 교회에 파당이 없다 해도 그것은 도덕적으로 수준 높은 교회는 될지언정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되는 조건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파당이 없는 교회를 교회라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의 도덕, 윤리의 기준과 시각으로 교회를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인간의 눈높이에서 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교회에 파당은 없을 수 없습니다. 땅위에 세워진 교회에 파당이 없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혹 파당이 없는 좋은 교회로 보인다 해도 파당을 이루는 인간의 본성은 존재하기에 조건과 기회가 되면 파당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파당을 없는 교회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
이것은 파당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교회에 파당이 드러났을 때 그것으로 교회의 신앙 수준이나 도덕성을 평가하려고 하는데 바울은 파당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파당은 우리의 시각이 아닌 바울의 시각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파당이 있으면 신앙이 없는 교회, 파당이 없으면 좋은 교회라는 시각부터 배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파당이 있음으로 해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지만 파당이 있을 때 파당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과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끼리 더 가까이 어울리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파당은 하나님의 뜻일까요? 인간의 뜻일까요?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아닌 것이 없다면 파당 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파당은 좋지 않은 것인데 그런 파당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파당이 하나님의 뜻의 전부가 아니라 파당을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이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의한 모든 일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을 믿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아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는 사람은 아들을 믿는 자이고, 참된 교회 역시 아들을 믿는 교회로 드러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행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조건과 결과를 배제한 채,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드러나는 교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주로 믿는 그것이 참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참된 교회가 인간의 활동과 행실, 교회의 사회사업 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파당이라고 하는 왠지 교회에 없어야 할 것 같은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가? 를 위시해서 믿음에 대한 모든 문제에까지 새로운 시각과 이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파당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나뉘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는 말처럼 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고 하지만 드러나는 교회의 현실은 항상 파당입니다.
여러분은 은석교회가 하나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모두 자기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나뉘어져 있습니다. 표면적 분쟁이 없다고 해서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편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파당과 파당 속에서 파당이 없는 세계를 보게 되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신자는 자신에게 있는 파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파당이 없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드러나는 파당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교회가 교회가 아님을 깨달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옳다고 인정하십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파당이 있을 때 흔히 목격하게 되는 것은 교회에 실망을 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것일까요?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해도 잠잠하거나 오히려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다’라고 하면서 만족해했는데, 파당이 있어서 떠나는 것이라면 결국 관심이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파당이 있음에도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교회를 떠나는가 남아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파당이 드러났을 때 파당으로 인해서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 둘 것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이 그리스도께 있음을 고백하게 되는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옳은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하나 됨입니다.
파당을 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파당이 죄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죄입니다. 파당은 인간이 죄라는 것을 드러내는 현상일 뿐입니다. 좋은 성격이나 성품으로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격 좋고 성품이 훌륭한 사람들이 모인다 해도 파당은 있습니다. 내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심으로 피 흘려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보다는 신앙 좋은 자신을 생각하는 습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파당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파당의 주동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파당의 주동자라는 말에 논쟁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인간됨과 신앙이 부인되는 것에 대한 반발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모든 교회의 관례가 아닙니다. 즉 교회에서 인간이 높임 받거나 인정되는 것이 관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관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며 피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는 우리 중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파당의 주동자, 분쟁의 주동자들이 모였는데 분쟁이 없겠습니까? 비록 웃음으로 대하고 악수 한다 해도 우리는 분쟁의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라는 것에 희망을 둘 수 없습니다. 바람직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헛된 꿈일 뿐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모아지는 것이 교회의 하나 됨입니다.
교회에 파당이 드러나지 않는다하여 파당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드러나 보이는 파당이 없다는 것으로 ‘우리 교회는 파당이 없는 좋은 교회’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이 죄의 존재임을 간과한 것일 뿐입니다. 인간이 죄의 존재임을 간과한 자들의 모임이 유익이 있을까요? 이러한 모임은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울 뿐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교회는 개선되어야 할 것이 없으며 개선해서 교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개선되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은 교회가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됨의 조건이 교회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개선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인간의 죄를 파악하고 구원이 그리스도께 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교회로 오십니까? 주일에 예배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신앙으로 사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실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옳다고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만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죄가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간과한 모임이라면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가 될 뿐입니다.
이러한 자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는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20-21절)는 것이 죄를 간과한 자들의 만찬입니다. 따라서 주의 만찬을 함께 먹었다는 것도 교회됨의 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답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그 생각의 중심에 무엇이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나 자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본질인 나가 아니라 신자다운 나를 생각하는 그 생각으로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내가 곧 파당의 주동자임을 알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