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2:18-25http://onlycross.net/videos/co1/co1-121825.mp4
<본문>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설교>
교회를 가장 편안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하여 예배를 드리는 모임, 또는 조직으로 보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교회를 다니는 개인은 교회가 정한 예배 시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신앙의 증표로 여기는 몇 가지를 실천하며 교회의 요구에 따라 내부적 활동에 적당히 참여해주면 됩니다. 그것이면 교회가 신앙이 있는 신자로 인정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은 깊이 알지 못해도 됩니다. 성경 전문가는 목사지 일반 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인은 목사의 설교를 들어주면 됩니다. 좋은 교훈적인 말에는 아멘하며 고개를 끄덕이면 되고 재밌는 예화를 하면 웃어주면 됩니다.
교인수가 많은 교회라면 옆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길거리에서 만난다 해도 같은 교회 교인인 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 이것이 현대 교회와 기독교인의 보편적 관계라고 할 것입니다. 교회라는 조직체에 속한 조직원으로서의 모습이 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향해서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18-20절)는 말을 합니다.
몸은 하나라는 바울의 말도 얼마든지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직체가 조직원에게 단합과 결속을 요구하는 것처럼 교회의 단합을 촉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한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형제와 같이 단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하면 교회를 처음 찾은 교인이라 해도 쉽게 수긍하며 이해할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의 환상에 치우친 교회 아닌 교회라고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일반적인 교회상이 깨어지고 전혀 알지 못한 새로운 교회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교회를 우리의 지식과 일반적인 이해로는 도무지 간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는 말이 교회를 인간이 만들어 세우거나 유지하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의 의미가 단순한 단합이나 결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표면적으로는 단합되고 결속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실제적으로는 줄이 끊어진 진주목걸이와 같은 관계입니다. 때문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인들의 단합과 결속으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자고 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으로 채워진 환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단합과 결속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하고 약한 것인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의 환상인 것입니다.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지만 각 지체를 가리켜 몸이라 하지 않습니다. 몸에 속한 것이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체에 비유한 바울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실제로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루고 있고, 머리의 의도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몸은 하나라고 하는 교회는 실제 한 몸이 아닙니다. 가령 교인 수가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모두가 자기를 위해 존재합니다. 자기를 위해 일하고 자기를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지 나 자신이 없는 한 몸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은 하나라’는 바울의 말은 이론적으로는 납득할 수 있다 해도 실제적으로 막연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 몸과 다르게 교회는 한 몸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해 있습니다.
창 2:24절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따라 교회는 부부를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부부도 각자 자기 생각으로 존재합니다. 생각이 맞지 않으면 충돌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처럼 부부도 한 몸이 되지 못하는데 각기 타인으로 함께 하는 교회에 한 몸의 관계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바울이 몸은 하나이니 하나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이미 한 몸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한 몸의 관계에서 서로가 지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설령 지체가 서로 다툰다 해도 한 몸의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지체가 서로 다투거나 비난하고 분쟁이 있으면 한 몸의 관계가 깨어졌다가 화해하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지체가 서로 다투고 분쟁이 있다 해도 한 몸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바울은 왜 긴 서신을 보내어 책망하고 충고하면서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21절)라는 말이나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25절)라고 말하는 것은 아름답고 이상적인 교회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로 말미암아 드러나야 하는 것은 지체가 아니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지체가 많다 해도 몸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한 몸에서는 지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몸만 드러나고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체가 자기를 증거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의미와 가치를 두는 것이 됩니다. 결국 지체로서 모든 존귀함과 가치가 몸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증거 하고자 함으로써 교회됨을 훼방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내가 은사 받았다’라는 것으로 은사를 자신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이 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사용합니다. 머리가 발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사용합니다. 몸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모든 지체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지체가 다른 지체와 구별하며 자기를 주장한다면 그것이 곧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일 뿐입니다(갈 6:8).
몸은 하나라고 했을 때 몸이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킨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체가 자신을 몸으로 간주하고 드러내고자 한다면 자신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서 나오는 믿음은 결국 자기를 위한 믿음으로 이해할 것이고 이것이 다른 믿음인 것입니다.
롬 8:10절에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 된 특징은 자기 몸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라면 신자는 자기 몸으로 자기를 위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에만 뜻과 소원을 두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자기를 위한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는 자기 몸으로 자기가 일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자기 공로가 없고 자신을 높일 가치 있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서 행하신 일만 있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오늘 마지막 주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외칠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서 일하신 덕분에 일 년을 살았습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는 신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이끄심으로써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일하신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자 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확정되었기에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이 없는 새로운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에 모든 가치와 존귀함을 두고 사는 새로운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는 것은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오시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됨으로써 누리는 은혜의 혜택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영이 오시지 않았다면 심판의 존재인 우리와는 무관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은사가 주어지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것이 은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받게 된 선물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받았다는 것이지 ‘내가 받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가 너를 믿는가’이고‘예수가 일하시는가 네가 일하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출 24:8절에 보면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뿌린 피는 제단에 뿌려진 피와 같은 피입니다. 흠 없는 거룩한 제물의 피를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는데 양푼에 담은 피를 백성들에게 뿌린 것입니다. 이처럼 제사에 참여한 백성들이 동일한 피를 뿌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세계이고, 십자가의 세계를 나타내고 증거 할 도구로 세움 받은 것이 교회라면 교회에 함께 한 지체들이 어떤 정신 아래 있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고 할 것입니다.
교회는 동일한 성령, 동일한 피를 받은 관계로 있습니다. 용서도 동일하고 은총도 은사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이며 의를 행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라는 점에서도 동일합니다. 때문에 인간의 육신에 의한 실천이나 실적에 따라 차등이 발생하는 것을 교회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은사를 받았고 활동을 하건 그 은사로 인해 사람이 차등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22-23절을 보면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쓸모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강자되기 위해 힘쓰고 전능하시다고 하는 하나님께도 자신을 강자로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강자가 되면 무엇을 증거하고 자랑할까요? 강자되게 하신 분일까요? 아니면 강자가 된 자신일까요? 약한 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강자 되고자 하는 것이 세상에 적응하고자 하는 욕망이기에 강자가 된다면 결국 자기 증거로 향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영원한 심판일 뿐입니다.
고전 1:27-29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자는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 위해서 스스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한 길로 가고자 할까요?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자입니다. 바울이 무슨 말을 했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든 우리는 마치 ‘나는 관심 없다’는 식으로 각자 자기를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신자는 그것이 미련하게 사는 것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약한 자신을 보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멸시하는 참으로 천한 자의 삶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세상을 향하는 자신을 드러내며 주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소망하는 믿음, 영원한 영광의 생명 앞에서는 돈도 세상에서의 강함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말입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는 같은 성령으로 이러한 믿음의 고백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이고 신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로 함께 하는 관계이기에 신자 됨을 따로 갖추어서 보여주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라는 것으로 이미 신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난 사람이 여자가 되기 위해서, 남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으로 완전한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증거 할 것은 ‘무엇이 나를 완전한 자리에 있게 하였는가?’인 것이지 다른 지체보다 더 나은 내가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