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설교>
◉ 그리스도의 그림자 ◉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를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표현하는가 하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신자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판으로 내세운 기독교인이라 이름하는 종교인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림자는 어둠속에 빛 아래에서 존재하고 무엇보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를 그림자라고 할 때 신자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는 그 곳에 있습니다. 실체는 왼쪽에 있는데 그림자는 오른쪽에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체가 움직이는 그대로 그림자인 신자가 따라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실제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그림자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을 뭐라 해야 할까요?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기 행동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죄의 기준이 이미 나름대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나쁜 것, 이것은 착한 것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자기 행동 또한 그 기준에 맞추어 판단합니다. 자기 기준에 의해서 누구나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여깁니다.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관계에서 본다면 다른 누군가의 신앙을 비판할 것 없이 내가 바로 비판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따져 본다면 무능하시고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믿고 따를 가치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 영광, 자기 확대, 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길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자인 신자가 따라 움직여야 하는 길 역시 자기 영광, 자기 확대와는 상관없는 길이여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영광과 자기 확대와는 상관없는 길을 추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를 위해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걸고 전진합니다. 그런데도 교회에 대한 열심히 있다는 것 하나로 스스로를 정당하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는 전혀 다르게 독자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죄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믿음이 그 본래의 의미로 이해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로 가셨다면 그림자인 신자의 길 또한 고난이어야 합니다. 그 사실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존재했던 사도바울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고백에서도 드러납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고난 위에서 고난의 길로 갈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죽음 위에서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길로 가려고 애를 씁니까?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며 무엇을 힘으로 의지하며 섬기고 있습니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하셨는데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신자라 할 수 있습니까?
◉ 세 가지 죄목 ◉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그때 그 무리들만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왕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은 우리 역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와 같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무리가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은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에게는 죄수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빌라도에게 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한 죄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백성을 미혹했고, 둘째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고, 셋째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고소한 것을 보면 어느 것 하나 옳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미혹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모세 율법을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는 그들의 눈에 율법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백성을 미혹하고 선동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세계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보였을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주인의 자리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종교세계를 위협하는 것을 진리로 인정할 수도 묵과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하는 것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는가(눅 20:22)라는 논란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눅 22:2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만 봐도 그들의 고소는 거짓으로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죽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신 19장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위증하는 자가 있으면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악을 제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율법에 따르자면 예수님을 고소하고 거짓 증거한 무리들이 죽임을 당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에 대해서는 철저하다고 하는 그들이 자신들이 행하는 거짓 증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고소 내용인 예수님이 왕 그리스도라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왕 그리스도라고 선포하신 적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인해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겼던 것이고 제자들 또한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무리들에게는 무엇이 사실이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제거할 명분을 만들어 내는 일에 급급했을 뿐입니다.
◉ 빌라도의 법정 ◉
여러분은 무리들의 이 같은 고소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내 세운 세 가지의 죄목은 모두 예수를 죽이기 위해 날조된 것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여러분을 예수님의 변호인으로 세워서 당시 그 현장에 파견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과연 주변의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르지 않고 당당하게 예수님의 무죄를 변론할 수 있겠습니까?
빌라도 법정의 분위기가 어떠할지는 여러분도 충분히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고 변론한다는 것은 예수와 한편으로 간주되어 함께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같은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빌라도에게 고소한 무리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지금의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었고 공회원들은 모두 귀족계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권력이 있었으며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들을 분노하게 할 수 있는 발언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의 그림자로 예수님이 움직이는 곳으로 함께 움직이겠다는 생각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그림자인 신자로 살아가는 것보다 내가 실체가 되고 내가 나의 그림자가 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위한 삶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예수님 편에서 예수님을 변호 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입니다. 실제 지금 우리의 삶 자체가 그러한 우리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 온 내용들은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물음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빌라도의 이 말에 무리는 반발하면서 더욱 강하게 예수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했다고 합니다. 총독인 빌라도에게도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힘없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오는 것이 귀찮지 않습니까? 가능하다면 교회와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살면서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마음만 갖고 있고 정기적으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으로 구원이 보장된다면 그렇게 신앙생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까?
구원이 목적인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구원만 되면 그만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는 것도 진심으로 십자가의 은혜가 고마워서가 아니라 십자가 은혜를 말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믿음이 믿음으로 인정되고 그 믿음으로 구원 받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여러분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으로 들리십니까? 반발이 있습니까? 당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그와 같았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있다고 믿었던 유대인들의 신앙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신앙의 최고의 자리에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붙들리신 것입니다. 그들과 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아직까지 자신을 보지 못한 무지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은 빌라도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예수 편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편이었고 그래서 예수가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고는 갈릴리를 관할하고 있는 헤롯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그때 마침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골치 아픈 사건을 헤롯에게 떠넘길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 없음을 알았다고 해서 그가 진리를 깨달은 것도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라는 한 사람의 무고함을 알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가 죄 없는 분임을 알고 있다고 해서 진리를 알았고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 편에 있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그림자로 실체이신 예수님을 따라 움직이는 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 평범한 신앙의 길 ◉
우리가 어둠의 세상에 신자라는 신분으로 존재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은 없어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없이 신자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급한대로 예수 없이도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은 얼마든지 존재 가능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생명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생각 중심에 자리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를 말만 하지 말고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그림자로, 신자로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 스스로를 향해서 신자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어둠의 세상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신자란 신분으로 존재하게 된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신분이 된 것으로 더 이상 얻어야 할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도 작금의 교회는 신자로 얻어야 할 것이 많음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붙들리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과는 무관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빌라도가 묻는 말에 답했을 뿐입니다. 무리들의 무고에 대해서 그 어떤 변호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증거는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빌라도 앞에서 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있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다른 증거를 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보여주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적과 체험 등을 내세우면서 신앙의 증거를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빌라도 앞에 힘없이 끌려나와 심문을 받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눈으로 확인되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미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표적을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색다른 것을 보기를 원하는 것은 예수를 붙잡아 죽이고자 하는 무리들처럼 자신에게 붙들려 말씀조차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죄를 용서하신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하시는 예수 아닌 예수를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기대할 것이 뭐겠습니까?
예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임을 고백하게 하고 예수님이 가신 곳으로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인해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관심은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기 확대에 있습니다. 복음은 이러한 종교의 관심에 철저하게 외면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힘없이 끌려와 심문을 받으시는 그 예수께 생명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신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만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멋있지도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 길로 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자랑이 될 만한 인생을 추구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며, 신자 된 내가 가게 되는 길도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한숨과 눈물의 길을 걷게 된다고 해도 예수님의 그림자로 걷는 그 길에만 영생의 기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