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설교>
◉ 억지로 진 십자가 ◉
예수님의 죄 없음을 세 번씩이나 선언했던 빌라도가 결국 무리들의 강압적인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그들 뜻대로 하도록 넘겨줍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예수를 골고다로 끌고 갈 때 있었던 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26절을 보면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된 것으로 유명합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쪽의 해안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지역에 그리스 말을 사용하는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시몬도 그 유대인들 중의 하나로 추측됩니다. 이 사람이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예수를 끌고 가는 사람들에게 붙들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시몬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그가 붙들려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은 그가 건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시몬의 입장에서는 전혀 원치 않던 십자가를 강제로 지고 예수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재수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님 주변에 시몬만이 아니라 백성과 예수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다고 말합니다. 시몬은 이들 무리와 함께 예수님 가까이 있다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시몬이 무슨 연유로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는 예수님 가까이 있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다고 장담한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은 도망치고 없는 그 자리에 시몬이 가까이 있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무리들이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때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지만 시몬은 가까이에 있었다는 점도 비교하여 생각해 볼 내용입니다.
물론 시몬이 예수님을 생각하고 가까이에 있었는지 아니면 단지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우연히 십자가 지고 끌려가는 예수님의 행렬을 마주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제자들은 도망치고 없는 자리에 시몬이 있다가 대신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내용이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베드로보다 시몬이 더 낫다거나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갈 때 억지로라도 십자가 질 기회가 생긴다는 의미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가 그런 의도로 시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로 갈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십자가를 자진해서 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길에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우리는 본래적으로 나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거나 해가 되는 일이라면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자진해서 십자가를 지는 일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있다면 그것은 시몬의 경우처럼 억지로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지고 있다는 것이 ‘재수 없다’라고 불평 하며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내 스스로 자진해서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십자가의 피를 믿습니다’‘십자가를 지고 어디든 가오리다’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얼마든지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질 수 있는 것이라면 제자들은 도망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결단과 각오와 의지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이기에 믿음이든 구원이든 그 어떤 것도 우리의 행함과는 무관한 것으로 증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고 예수를 따라갔을 때 ‘내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랐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시몬이 아예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당한 일을 재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 마음을 둔 사람이라면 십자가를 진 것을 자신이 한 일로 간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 것이 자신의 본래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기 때문이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에 의해 짊어지게 된 것으로만 바라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9:16절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는 말을 합니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은 무의식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는 복음과 무관한 사람이었지만 복음에 의해 다스림 받으면서 그 복음의 힘에 이끌려 복음을 전하는 길로 가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득불 하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득불 할 일임이라”는 것은 억지로라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지에 의해서 억지로라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무엇을 했다 해도 자신이 한 일은 없으며 당연히 자랑할 일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원해서 한 것과 시몬처럼 억지로 하게 된 것을 구분하여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가 자원해서 한 것이 있다면 자원하는 그 마음까지도 본래의 자기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에 누가 자원하겠습니까? 십자가 지는 것이 돈이 생기고 원하는 일을 이루는 것이라면 서로 자원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지는 것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돈이 생기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는커녕 세상에서 미움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십자가 지는 것을 자원한다면 그 마음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예수님 가까이에는 시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오지 않는 누가만의 기록입니다. 누가는 과연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예수님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는 적은 수가 아닌 큰 무리였다고 말하는데 예수님을 위해 울어주는 여인의 무리가 그렇게 많았다는 것이 사실 뜻밖이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울음에 대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합니다. 여인들이 우는 이유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여인들은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비참한 모습으로 인해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의 모습은 여인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정이며 감상적인 눈물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저주의 길입니다. 그 저주는 애당초 우리가 짊어져야 할 죄의 값이었습니다. 그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보면서 그 비참한 모습에 동정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에 속한 자신의 비참함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비참한 모습으로 골고다로 글려가고 계시지만 예수님은 실패자도 패배자도 아닙니다. 끌려가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순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현재 당하시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는 생각하지 못한 채 예수님의 고난만 바라보며 눈물 흘립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고난에 대한 현대 교인들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것은 있으나 자신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인들의 눈물이 동정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자신들의 기대가 무너짐으로 인한 실망과 허탈과 분노가 어우러진 결과라고 해도 동일한 것은 자신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주에 속한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했기에 자신을 위해 울 줄은 모르고 다만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현대 교회가 고난 주간이 되면 예수님의 고난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고난 주간이라는 기간이 지나가는 것과 함께 지나가는 것이 됨을 생각하다면 여인들의 눈물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인들의 울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끝나면 더 이상 울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여인들을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부르시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21:20절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것으로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고 있는 것 자체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부르시는 것은 ‘너희가 멸망에 속한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멸망에 속한 자로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과 자식을 위해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자식을 위해 우십니까?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울지 말라고 해도 울게 될 것입니다. 자식으로 인해 속이 상할 때도 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울음은 세상의 환경으로 인한 것이지 저주에 속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때문만도 아니고 자기 삶의 어려움 때문만도 아니라 저주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로 인한 울음, 즉 애통함이 있어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을 저주에서 건지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복된 사건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복과 저주 ◉
29절에 보면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눅 21:23절에서는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면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일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이 저주로 바뀐 것입니다. 세상의 정상적인 가치관이 뒤집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상황입니다. 복으로 여겼던 것들 때문에 화를 당하고, 저주로 여겼던 일들이 오히려 복이 되는 때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현재의 일로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저주에 속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로 인해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누구시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라는 죽음의 길로 가신 예수님에게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회개의 눈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저주에 속한 것이 곧 자신임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한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30절에서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호 10:8절의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는 구절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서의 내용은 산당에서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 인해 심판을 받을 때 그 심판이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산이 자신들 위에 무너져 죽는 것이 낫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죄가 그토록 큰 것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예루살렘의 죄 또한 산이 덮쳐서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고 가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31절에서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마른 나무는 예루살렘의 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죄 없는 예수님조차 십자가의 길로 가게 하실 정도로 죄와 심판에 대해 철저하시다면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한 심판은 얼마나 철저할지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억지로라도 죽음의 자리로 끌고 나오실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보게 할 것입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하시고 그 같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며 넘치는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넉넉함이 되는 삶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십자가를 아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순종하기를 원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주의 일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인생은 결국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만이 우리 인생의 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