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3.16 15:36

(96강) 화평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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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4:26-33http://onlycross.net/videos/co1/co1-142633.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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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6.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설교>

인간은 항상 자기 유익을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 유익 되지 않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회피하며 불평 합니다. 자신이 한 일은 모두 칭찬으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타인에게 인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러한 속성의 인간은 믿음도 자기 유익을 위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자신에게 유익 되지 않는 믿음은 가치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대한 시각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교회를 찾는 것으로 인간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인간성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둔하고 무지합니다. 설령 믿음이 불가능한 인간성에 대해 말한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러한 인간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성품이나 성격, 또한 세상이 말하는 인품도 각각 다른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겠지만 동일한 것은 사탄에게 지배당하는 인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교회든 인간으로 인한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로 오히려 교회에 문제를 야기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모든 것을 복음이 전해지기 위한 상황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비록 하나님의 교회로 지칭을 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전해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복음을 아는 교회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이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복음은 계속 전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 하나님의 교회는 복음이 전해져야 하고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세상과 다른 십자가의 세계를 증거 할 도구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생각은 방향을 달리합니다. 대개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합니다. 문제없는 교회를 교회다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의 문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조성한 상황이었고, 어떤 문제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인간성이 예수 밖에 있는 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죄의 존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안에 부름을 받았든 예수 밖에 있든 인간이기에 나타나는 죄의 문제는 동일합니다. 모든 일에서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 존재라는 점에서는 차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고린도교회처럼 은사로 인한 문제가 표면적으로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사로 인해 드러난 인간성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동일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면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교회를 오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전도와 선교에 힘을 쏟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와 선교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에만 초점을 둠으로 해서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작 교회가 복음이 전해져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시선이었기에 은사 문제를 도구로 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전달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6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말합니다.

 

 

초대 교회가 모여서 어떤 방식으로 예배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바울의 말을 통해서 당시 예배에 찬송,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11장에서 우리가 성찬식으로 행하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한 문제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성찬도 예배에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신자가 각기 말씀과 계시와 방언과 통역의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어떤 문제를 야기했을까요? 각기 자기가 받은 은사를 따라 서로 말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누군가가 자신이 말씀을 전하겠다고 하면 나도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 왜 당신만 전하려고 하느냐?’라며 항의하지 않았을까요? 은사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그러한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가 있어서 예배를 인도하고 주관합니다. 때문에 예배가 무질서해 질 염려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자기 마음대로 예배 시간에 나서서 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지금과 같은 담임목사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도가 교회에 머무르며 복음을 전한다면 모르지만 사도도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 서로가 자신이 받은 은사를 드러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 때문이었는지 바울은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27-30)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방언이든 예언이든 두 세 사람으로 제한합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방언은 잠잠하라고 하고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을 때도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언하는 자가 말할 때 다른 이들은 분별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말을 어떤 법칙을 세우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누군가가 방언을 말하고자 한다면 순서를 정해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만 말하고 그것도 통역이 없이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법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법칙을 세우는 것이라면 본문은 우리와는 무관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자기가 받은 은사를 따라 서로 방언을 하고 예언하고 계시를 전하기 위해 다투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자신을 들어야 하는 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모두가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하며 자기 영광을 추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듣는 것보다는 말하는 것을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듣는 자리에 있는 것을 낮은 자, 말하는 자리에 있는 것을 높은 자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면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식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말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목사를 높은 자, 듣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을 낮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교인은 목사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곡해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 한국교회의 실상인 것입니다.

 

 

은사는 성령으로 인해 주어집니다. 개인의 노력이나 조건과 무관하게 성령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은총입니다. 따라서 은사를 받았다 해도 그것을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거나 구원 받았다는 증표로 활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사 받음을 구원 받은 증표로 여긴다면 자신을 복음이 전해져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이미 복음을 알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가 은사로 넘쳤을 때 은사 받은 자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지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자부해도 분명한 것은 악한 인간성을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인간성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고 보지 않고 있을 뿐이지 사람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복음을 안다면 그것까지도 자기영광을 위해 이용할 자가 우리들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여전히 복음을 들어야 하고 복음이 전해져야 할 대상으로 함께 하는 것이고 그것이 교회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이기에 복음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보면서 먼저 목사 자신에게 복음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교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거나 믿게 하고 믿음을 자라게 하겠다는 의도로 설교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을 가르치는 자라는 위치에 두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특히 교인을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지체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의식들이 여러 모양의 목사의 폐단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31절에서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교회는 복음을 배우고 복음으로 인해 권면을 받기 위해 함께 합니다. 권면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언을 하는 자라 할지라도 자신이 말하는 예언으로 자신이 권면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예언하는 자의 실력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것이고, 예언을 하게 되는 것은 전달자라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잠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들어야 하는 자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인한 자기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복음을 아는 자가 아닌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자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복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험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복음이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것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 모두가 복음을 듣지 않으면 안되는 무지한 존재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 누구에게도 우월의 도구로 이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항상 자신에게서 지켜야 하는 것은 복음을 듣지 않으면 안되는 자라는 자기 인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을 아는 인간은 없습니다. 복음에 지배 받으며 끌려가는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복음에 지배 받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속성의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채 자기 유익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항상 복음을 듣고 복음이 전달되어 자신의 실상을 깨달으며 복음의 지배 아래 있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화평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3)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질서는 원칙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이 질서를 위해 국가는 법을 세우고 개인이 자기를 위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통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법을 만들고 법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질서는 법에 의해서 지켜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무질서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려고 하면서 예배가 난장판이 되는 것 때문에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의 우월과 영광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무질서입니다. 그렇다면 질서는 십자가에 복종하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이 증거 되고 누구도 우월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 질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십자가로 끌어가는 하나님을 화평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화평은 십자가에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방언하는 나’‘예언하는 나’‘복음을 아는 나이 모든 것은 거짓되고 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로 인한 나는 무너지고 십자가 사랑을 받은, 사랑에 의한 나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십자가로 증거 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관심은 사랑으로 향해야 하고 이것이 화평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은 곧 질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십자가로 인해서 죽음의 존재라는 동일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만 소망하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는 없는 질서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늘 무질서합니다. 무질서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영광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러분 자신에게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질서의 존재다라는 자기 인식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안다 해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나의 이익을 좇고 추구하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모든 것에서 무질서의 존재인 자신을 실감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복음이 전달되게 하시고 듣게 하시며 십자가로 모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온전히 십자가로 시작하여 십자가만 증거 되는 것이 질서 있는 참된 교회로 세워가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에 방언, 통역, 예언 등등의 은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신자가 복음에 다스림을 받으면 오직 그리스도만을 구원자로,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고백이 있는 신자로 세우시기 위해 복음을 주시고 듣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이해한다 해도 복음의 사람은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주는 십자가가 안에서 자신을 바르게 알게 되는 그들이 복음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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