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3-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0304.mp4
<본문>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설교>
본문에서 바울은 ‘성경대로’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이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은 성경대로 하신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으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많은 교회가 ‘우리는 성경대로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곧 인간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인간은 성경대로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성경대로 산다고 자부했지만 그것 자체가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성경대로 산다면 그것은 성경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성경대로 살 수 없는 죄의 존재라는 것을 성경과 우리의 삶을 연결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 전부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한 예를 들면 시 136:8-9절에서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의 빛, 해와 달과 별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증거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시 136편은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산다면 해와 달과 별로 인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닫고 날마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대로가 우리에게 가능할까요? 그래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또 성경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뜻은 죄를 알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죄 되게 하심으로 인간은 죄의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의 존재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받은 유대인처럼 율법 조항들을 실천하여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결과가 됩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는 말씀을 하시며 책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대로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 교단이든 교회든 자신들이 성경대로 한다는 것을 내세워 자신의 정당함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은 성경대로 한다는 것이 사실은 성경을 외면하고 성경을 알지 못하고 성경대로 하지 않고 있는 증거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성경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성경대로 라는 말은 쉽게 합니다.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예수 믿는다는 말을 쉽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경대로라는 말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이 말의 의미에는 크게 관심 두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다시 사는 부활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이 우리에게는 구원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성경대로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흔히 성경대로라는 말을 문자적 성취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실 것에 대한 내용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고, 예수님이 그 예언대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문자의 성취를 성경대로라는 말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대로가 그런 문자적 의미라면 구약성경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예언한 내용이 없습니다.
물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셔서 고난을 받고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는 내용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사드릴 때 바쳐지는 희생 제물입니다. 희생 제물이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실 예수님을 보여준다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구약에도 부활 사상이 있습니다. 이삭이 죽음 직전에 살아나고 대신 숫양이 제물로 죽은 것이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에도 죽음에서 살아난 부활로 연결하여 해서갈 수 있습니다.
특히 단 12:2절의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라는 내용을 보면 분명 부활사상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 22:23절에 보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했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부활은 예수님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어진 사상입니다. 때문에 구약에도 부활 사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죽으신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대로가 문자적 성취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행함으로 지켜야 할 법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행함으로 지키는 인간의 의로움이 부각될 것이고, 그것은 율법을 죄를 깨닫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대로라는 말을 성경에 기록된 문자대로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문자적으로 증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연결된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문자로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도‘성경대로’라는 말을‘문자대로 이루셨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일단 성경대로라는 말을 제외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죄 용서와 부활, 즉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구원을 말한다는 생각을 쉽게 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말한 것처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는 생명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서 인간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이 붙들려 십자가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제자 한 사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을 장사지내고 모든 사람에게 죽은 자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사람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신 일에 인간이 한 것은 죄가 전부입니다. 구원 받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믿음으로 갖추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기 전이나 구원 받은 후나 인간은 죄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죄에서 의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서 죄의 존재로 서게 될 뿐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죄로 인한 심판이 당연한 자의 입장에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받게 되는 삶, 구원은 구원될 수 없는 죄의 존재인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신 구원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것을 증거 합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된 것을 믿는다면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받아서 교회에 전한 복음입니다.
롬 1:16,17절에 보면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말이 우리에게는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성경대로, 즉 바울이 말한 대로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어야 할까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했고, 그것이 성경이니까 우리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은‘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전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한 전도 훈련을 하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하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성경대로 하는 것입니까?
복음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가 죄인 된 우리에게 의가 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여김 받고 영원한 삶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행함과 무관한 예수님이 홀로 이루신 일이라면 복음의 세계에서는 행함으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되거나 반대로 믿음 없는 사람으로 무시되는 것은 없습니다.
은사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서는 은사 때문에 차별되지 않습니다. 은사가 신자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의로움이고 생명인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가치 없는 헛된 것을 가지고 그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를 과시하려고 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 없으면 부끄러워하고, 남들처럼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움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기준에 의해 가지는 부끄러움이라면 그것이 성경대로 하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지 않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어떤 평가와 판단에 대해서도 당당했습니다. 따라서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한 것은 자신의 업적이나 옳음으로 인한 자신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 현실은 인간의 행함이 기준 되어 당당한 사람과 당당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설령 바울의 복음을 들었다 해도 지키지 못하고 헛되이 믿은 것일 뿐입니다.
시 71:15-16절을 보면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 주의 공의와 구원으로 인한 것임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라면 우리가 성경대로 하는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인한 공로와 의가 아니라 주의 공의만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행하든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주의 공의임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성경대로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대로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목사나 교회의 정당함, 의로움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은 주의 공의만 전하라는 성경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를 멸시하는 헛된 믿음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무지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성경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했습니다”“하나님이 홍해를 열어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것이 성경이고 사실입니다”이런 말들은 무의미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사실로 믿는 것이 성경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성경의 모든 내용을 사실로 믿고 받아들인다 해도 예수님이 의가 되심을 알지 못하면 믿음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디는 것이 성경대로 말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가 성경에 대해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알고 그 말을 따라가는 것이 성경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또 다시 말씀드릴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이기에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성경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만이 의가 되심을 믿고 자신의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성경대로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요 8장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성경대로 하는 것은 돌로 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모두 떠나버립니다.
그러면 이들이 성경대로 한다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자신들 또한 여자를 정죄할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하면 복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허구이며 당연히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앞에서 성경대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늘의 말씀으로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성경대로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의 나라에서 사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