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7:1-8http://onlycross.net/videos/exo/exo-270108.mp4
<본문>
1.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2.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이어지게 하고 그 제단을 놋으로 싸고
3.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제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
4.제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 고리 넷을 만들고
5.그물은 제단 주위 가장자리 아래 곧 제단 절반에 오르게 할지며
6.또 그 제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
7.제단 양쪽 고리에 그 채를 꿰어 제단을 메게 할지며
8.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설교>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이 세상 현실입니다(롬 5:17). 이것을 두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합니다(고전 15:22). 이 말씀대로 모든 인간은 죽음의 몸으로 죽음의 세력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존재합니다. 때문에 죽음은 누군가에게만 선택적으로 닥치는 불행이나 비극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죄의 값으로 주어지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2-23)고 말씀하는 것처럼 죽음의 존재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존재가 어떻게 생명을 얻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으로 등장한 것이 제단입니다.
1절을 보면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8절까지 제단의 모양과 크기에 대한 자세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제단에서 바쳐질 제물과 제사에 대한 내용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먼저 분명히 전달받아야 하는 것은 성막에 인간의 생각은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제물을 바치고 제사하는 인간의 정성이나 열심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존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생명을 얻게 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성막에서 무엇을 하든‘우리가 이것을 했습니다’라는 자기 자랑이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결과가 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참된 신앙은 절대 불가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만 드러나고 그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것이 참된 신앙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인간중심이 되고 자기 자랑과 공로로 흘러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보다는 자기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에 뜻을 둔 신앙이기에 거짓과 위선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창 8:20절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라고 말합니다.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정결한 제물로 제사를 드린 것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행위였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노아가 구원 받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노아가 홍수로 죽임을 당한 모든 사람들과 다른 의로운 존재였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면 그것은 노아가 죄가 없는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노아가 제단을 쌓은 것은 구원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구원의 근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결한 존재로 인해 심판에서 구원 받았음을 보여주는 제사입니다. 노아가 쌓은 제단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것도 하나님의 작정하심으로 오실 구원자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당연한 죽음의 존재를 위해 죄 없는 거룩한 존재가 희생함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미리 보여준다는 점에서 노아의 제단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나온 신자의 자랑과 가치는 거룩한 제물의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신자의 자랑은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반드시 자각되어야 하는 것은 제물의 희생이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십자가 중심으로 바르게 해석하고 말한다고 해서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신자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신자란 예수님이 흘리신 피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자신의 무능을 증거하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었음을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증인의 길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제단에 제물 바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극치입니다. 인간의 그러한 욕망에 의해 제물이 불에 태워져 희생당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고 제물 바치는 자기 정성을 하나님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악함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 1:4절에 보면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으로 사정없이 책망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 바치는 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바친 것을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한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는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단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너희는 불에 태워져 죽는 제물처럼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할 존재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제단 앞에서 제물 바친 자기 행위를 생각하고 그것에 가치를 두고 믿음의 행위로 높이고자 하는 것은 제단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십자가 앞에서 버려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 6:26절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합니다.
새보다 사람이 더 귀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와 하나님은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입니다. 사람 역시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귀하기 때문에 단지 먹고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건져 생명에 있게 하신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신 것이고 사랑 받을 수 없는 자가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현장이 제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보장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는 것이 복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나 의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막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아지고 사랑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간의 행함을 보시며 하나하나 기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악하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죄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보게 하십니다. 인간에게 내려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제단의 제물에게 내려짐으로써 ‘인간이 누구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도 말고 십자가도 말하지만 항상 결론은 자기 구원으로 맺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가 용서되고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이 빠진다면 어떤 결과가 예상될까요? 예수를 믿는 자기 자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에서 하나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 구원입니다. 구원 받는다는 결과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어떻게 구원이 되고 그 믿음이 인간에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믿으면 된다’는 것만 있습니다.
믿으면 된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 하늘로 가시면 됩니다. 믿으면 된다는 생각까지도 인간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존재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근거를 내가 아니라 예수의 피에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