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3.22 09:08

(21강) 뿌려진 숯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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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0:1-8http://onlycross.net/videos/eze/eze-10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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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그들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더라

2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3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오른쪽에 서 있고 구름은 안뜰에 가득하며

4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5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6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에게 명령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가져 가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7 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8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라

 

<설교>

 

현대 기독교의 오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오류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풍요와 다산으로 힘을 주는 신이었고 그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알이든 무엇이든 어떤 우상이라 해도 자신들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신이라면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우상을 섬긴 것도 이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 선택한 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세워 놓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믿음의 대상에게 자신의 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은 복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을 얻기 위한 수단과 통로로서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신을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선택으로 시작합니다.

 

 

롬 9:11-13절을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야곱과 에서 두 사람 중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야곱입니다. 야곱이 무엇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야곱도 에서도 불의한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드러낼 의가 있지만 겸손을 위해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자랑할 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랑할 의가 없음을 알게 될 때 신자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공로와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의 풍성하심을 증거하고 자랑하는 그릇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신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생각할까요? 신앙을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길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바르게 보면서 하나님께서 불의한 인간을 사랑할 자로 선택하여 세운 것이 신자이고, 하나님이 선택한 신자를 그릇으로 삼아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고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에 인간의 열심과 정성이라는 것은 개입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업적과 공로에 따라 복을 받고 상을 받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지금도 그대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성전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에스겔을 성전으로 데려 가셔서 우상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성전을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고 성전에서 기도하거나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본인에게는 복과 은혜가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성전에서의 그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전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굳이 성전이 아니라 해도 우상을 섬기는 종교적인 속성은 우리의 모든 삶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인해 그 같은 속성이 폭로되면서 우리가 신앙이라고 여겼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을 뿐이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이끌려 왔을 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고 말씀합니다.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에게 숯불을 성읍 위에 흩으라고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린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 가득히 움켜쥐고 성읍 위에 흩으라는 것입니다.

 

 

숯불을 성읍에 흩으는 것은 예루살렘 성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우상을 섬겼으니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한 채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의 잘못된 신앙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죄로 보지 않았고 따라서 가증한 죄로 인한 애통함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지만 자신의 끝을 볼 수 있는 눈이 감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숯불을 성읍에 흩었을 때에 성전은 무사할까요? 성전 역시 흩어 버린 숯불 아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에 세워진 성전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줄 피난처가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성전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불타서 무너지고 사라질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성전을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고 성전에서 행하는 것들로 인해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을 거룩한 장소로 생각하고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봉사하면 복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심판 아래 있다면 예배당 역시 심판으로 인해 무너질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배당에서의 행위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복을 주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됩니다.

 

 

세상은 흩어 버린 숯불 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부정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의로운 것이고, 성경 보는 것도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성전 신앙이며 우리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앙을 잘못 이해하는 대표적인 것은 신앙을 행동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없거나 적은 것은 신앙이 아니거나 게으른 것으로 여깁니다. 특히 약 2:26절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을 수시로 거론하면서 산 믿음의 증거는 행함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의 증거를 행함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숯불이 성읍 위에 뿌려진 것은 성읍의 모든 것이 심판의 대상임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것은 성읍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 또한 의로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러낼 의로운 행위라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거룩한 곳으로 여겼던 성전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성전에 여호와는 계시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그냥 건축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건축물 안에서 의로움이 되는 행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열심을 받아주는 분으로 오해하는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19절을 보면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고 말합니다.

 

 

그룹들이 땅에서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서 떠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서 떠났다는 것은 영광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원했던 성전 건축을 허락하시고 그 성전에 영광으로 임하셨다가 떠나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인간이 원하고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할 곳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왕상 8:16절에 보면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이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솔로몬은 성전을 여호와의 이름을 둘 집으로 여겼습니다. 솔로몬이 몰랐던 것은 인간은 자기 이름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기 위한 명목으로 건축한 성전이지만 결국 자기 이름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장소로 전락될 것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전을 통하여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지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궁극에는 성전을 파괴하시고 성전에서 떠나심으로 땅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함께 하시는 그 어떤 곳도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국 성전은 인간의 실패의 증거물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심판의 세상에 참된 성전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주만 있는 실패의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복을 주기 위해서일까요? 숯불이 뿌려진 상태의 세상은 애당초 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누구든 복을 원한다면 그 사람은 이스라엘처럼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소경일 뿐입니다. 저주에 속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실패의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제물 되심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거룩한 길로 인도하실 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도록 우리에게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없습니다. 10장에는 바퀴들이 나오는데, 이 바퀴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천사와 함께 움직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지금도 바퀴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바퀴의 활동으로 인해서 우리가 주를 믿게 되는 것이고 영원한 주의 나라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우리의 뜻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이끌려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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