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서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그 문에 사람이 스물다섯 명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라
2.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니라
3.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
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
5.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6.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그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
7.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성읍 중에서 너희가 죽인 시체는 그 고기요 이 성읍은 그 가마인데 너희는 그 가운데에서 끌려 나오리라
8.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이르게 하고
9.너희를 그 성읍 가운데에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넘겨 너희에게 벌을 내리리니
10.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심판하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1.이 성읍은 너희 가마가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그 가운데에 고기가 되지 아니할지라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 변경에서 심판하리니
12.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너희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 사방에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 행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
13.이에 내가 예언할 때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로 내가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하니라
<설교>
자유의지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선이든 악이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데 그것이 자유의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악을 택하지 않고 선을 택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힘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선언하며 사도 바울은 불순종의 아들들, 진노의 자녀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진노의 자녀, 악의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러한 인간 상태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수긍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이 있게 되었다고 해서 악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개선되는 것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 부분에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없을 때에는 악의 상태에서 죄를 행하고 살았지만 신앙이 있은 후에는 악의 상태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말씀에 순종하고 선을 행하며 살게 된다는 지극히 종교적인 생각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것을‘성화’라는 단어로 설명을 하면서 결국 외적으로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신앙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된 것입니다.
인간과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현대 교회는 신앙을 차별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세상에서의 잘되고 못되는 것으로 신앙의 좋고 나쁨을 저울질 하는 해악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복을 받고 좋지 않은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원시종교, 무속신앙 수준의 말을 남발하면서 좋은 일이 있는 사람은 신앙이 좋아서 복을 받은 것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어서 벌을 받은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결단코 이러한 하나님, 이러한 교회, 이러한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종교를 주관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궤변일 뿐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고통을 겪을 때 나는 순탄한 삶을 산다고 해서 특별히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생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눈도 가리게 하며 결국 망하는 길로 끌어가는 악마적 생각입니다. 타인의 고통에서 자신의 안전과 복을 확인하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죄악 중에 출생하여(시 51:5)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선을 실천하고 지켜 낼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에 비해 순탄한 삶을 살고 상대적으로 고통을 덜 겪는다고 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더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생각에 붙들린 사람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여호와의 전 동문에 이릅니다. 그리고 거기서 스물다섯 명의 사람을 보게 되는데 모두 백성의 고관들이었습니다. 백성의 고관이라면 백성의 지도자라는 뜻인데 이들은 8:16절에서 태양에게 예배하던 스물다섯명의 사람과는 또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도자라면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길로 바르게 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돕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내에서 그러한 지도자를 찾아보기란 애당초 헛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겔이 목격한 성전의 광경은 장로들과 제사장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 하나도 우상을 섬기는 일을 책망하고 경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일에 앞장 선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스물다섯 명의 고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본 스물다섯 명에 대해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니라”(2절)고 말씀합니다. 이들은 또 어떤 일을 행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것일까요? 3절에 보면 그들은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미는 자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미는 자라는 선언을 듣는 것일까요? 사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는 힘듭니다. 다만 문맥을 통해서 최대한 가까이 그 뜻에 접근해 볼 뿐입니다. 먼저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했다는 것은 집을 건축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를 고기가 된다는 말은 자신들을 단단한 가마 속에 들어 있는 고기로 비유하여 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만큼 자신들은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왕과 함께 많은 고관들과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에스겔이 본 스물다섯 명의 고관은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 와중에 그들이 생각한 것은 자신들은 가마 속의 고기처럼 안전하고 이제 예루살렘의 남은 모든 것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 비해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했습니다.
15절을 보면 “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스물다섯 명의 고관들과 주민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고통을 겪고 있는 형제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포로로 끌려간 것은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난 것이고, 그것은 그들이 저주 받은 죄인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들은 그들보다 신앙이 우월하여 그 땅을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그들이 품고 있는 불의고 악한 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자신의 우월을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의를 품고 있고 악한 꾀를 꾸미는 것으로 말씀한다는 사실에 주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그들 생각을 말씀하시며 여호와께서 그 모든 생각을 아신다는 것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신다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6절에서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그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고 하시고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이르게 하고 너희를 그 성읍 가운데에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넘겨 너희에게 벌을 내리리니”(8,9절)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들을 가마 속에 들어 있는 고기로 비유하며 안전하다고 하고 그 모든 것을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 비해 신앙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불의함과 악한 꾀에 대해 칼을 보내어 심판하시고 그들이 안전하다고 한 가마에서 끌려 나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고관들은 예루살렘 성을 의지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자신들에게 든든한 가마가 되어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 역시 자신을 보호해줄 든든한 가마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가마 속에 고기가 되어 평생을 고통에서 멀어진 채 안전하게 살아가는 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하나님이 동의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버려야 합니다. 우린 그것을 본문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취지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있게 된 것을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 비해 우월하고 특별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자체가 불의한 것이고 악한 꾀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마 속의 고기로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 칼을 들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분이 바로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찾고 배우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삶이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순탄한다고 해서 신앙이 낫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여 자신의 잘남을 나타내려는 불의며 악한 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우리를 순탄한 삶에서 끌어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이 순탄하든 순탄하지 않든 삶의 환경이 신앙의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예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신앙이 옳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먹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 은혜를 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이 든든한 가마가 되어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미는 고관들이 평소에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했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바벨론이 침략하지 않고 예루살렘이 평안한 가운데 있었다고 해도 고관들은 자신들을 우월하게 여기며 백성들을 무시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겼을 것입니다. 6절의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그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는 말씀이 고관들의 횡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스물다섯 명의 고관들은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가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예루살렘을 기업으로 주기 위해 남겨 두셨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나은 환경을 빌미로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고 자신에게 함께 하고 계심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 또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고 우월감일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든 동일한 것은 죄가 드러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순탄하면 순탄한 대로, 순탄치 못하면 순탄치 못한 대로 인간은 늘 악을 행하고 살아갑니다. 고관들처럼 환경이 조금 나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바라보며 우월함을 누리는 오만과 불의와 악한 꾀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 저와 여러분의 실상입니다. 타인보다 삶의 형편이 낫다는 것으로 결코 큰 소리 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남아 있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벨론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함께 하심을 안다면 그곳이 거룩한 성전이 되고 천국이 됩니다.
반면에 비록 예루살렘에 남아 있어서 바벨론 포로 된 사람보다 나은 형편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고 함께 하심을 생각하지 아니하면 예루살렘 성만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에만 붙들려 있다면 그 곳이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 지옥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 형편, 환경과 무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번역돼 나온 책 중에 “무통문명”이라는 일본인 모리오카 마사히로 라는 철학자가 쓴 사상서가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문명의 특징을 ‘고통을 없애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의 특징이 인간을 망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문명이 ‘신체의 욕망’에만 충실히 따르며 고통을 피하고 쾌락만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안락함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신체의 욕망’ 때문에, 현대의 인간은 오히려 인간에게 내재된 ‘생명의 기쁨’을 제거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생명의 기쁨’은 불가피한 고통을 인간이 스스로 바꾸어 나갈 때 생기는 기쁨을 말하는데, 현대인들의 안락함, 고통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바가 인류를 혼수상태에 빠트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처럼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일면을 꼬집는 정확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통문명’이라는 그 제목이 지금의 신앙 세계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문명이 고통을 없애는 것이라면 지금의 기독교 신앙 역시 고통을 없애는 것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없는 삶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로 해석하는 것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졸지에 믿음이 없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고통 없는 삶이라고 해서 자기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행복해 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우리를 고통이 없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으며 하나님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천국이 되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자에게는 남보다 나은 삶의 형편이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알아가고 그 은혜에 붙들리는 것이 즐거움이 됩니다. 이 즐거움이 있는 그가 성령이 임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