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4.26 09:03

(25강) 남기신 몇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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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2:1-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1201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3.인자야 너는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끌려가라 네가 네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그들이 보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혹 생각이 있으리라

4.너는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네 포로의 행장을 밖에 내놓기를 끌려가는 포로의 행장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들의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

5.너는 그들의 목전에서 성벽을 뚫고 그리로 따라 옮기되

6.캄캄할 때에 그들의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내가 너를 세워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게 함이라 하시기로

7.내가 그 명령대로 행하여 낮에 나의 행장을 끌려가는 포로의 행장 같이 내놓고 저물 때에 내 손으로 성벽을 뚫고 캄캄할 때에 행장을 내다가 그들의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니라

8.이튿날 아침에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인자야 이스라엘 족속 곧 그 반역하는 족속이 네게 묻기를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아니하더냐

10.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은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묵시라 하셨다 하고

11.또 말하기를 나는 너희 징조라 내가 행한 대로 그들도 포로로 사로잡혀 가리라

12.무리가 성벽을 뚫고 행장을 그리로 가지고 나가고 그 중에 왕은 어두울 때에 어깨에 행장을 메고 나가며 눈으로 땅을 보지 아니하려고 자기 얼굴을 가리리라 하라

13.내가 또 내 그물을 그의 위에 치고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그를 끌고 갈대아 땅 바벨론에 이르리니 그가 거기에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14.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 부대들을 다 사방으로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15.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나라 가운데에 헤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16.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이 이르는 이방인 가운데에서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설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동족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으로 비방하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것처럼 여긴 성전의 고관들에 대해 하나님은 칼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여러 나라에 흩어서 포로 되게 하신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며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여 그들을 백성이 되게 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합니다(겔 11:19,20).

 

 

이러한 내용을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보다 포로가 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의 편에 서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두가 동일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든 포로가 되었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배신하고 자기의 뜻을 앞세워 자신을 위해 우상을 섬겼던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포로 된 백성들 편에 서신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였던 고관들의 악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지고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된 것은 포로 된 백성들에게나 포로로 끌려간 것을 목도한 백성들 모두에게 그들의 악함을 보게 하고 듣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상태를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2절)고 말씀하심으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에스겔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로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또한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반역한 족속의 길로 계속 걸어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고 듣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고 이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에스겔을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반역하는 족속은 죄로 인해 징벌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반역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인데 우상을 섬긴 것이 반역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그들의 반역을 우상을 섬긴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무감각과 어리석음으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어리석어서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 무감각과 어리석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야 오늘 우리의 현재 상태에 대해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 115:4-8절에 보면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금과 은을 재료로 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진 우상은 비록 입과 눈과 귀와 코가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사람처럼 말하고 보고 듣고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함이 아니라 생명이 없고 무능하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말입니다. 겉으로는 어떤 능력과 힘이 있는 존재로 인정받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없기에 생명에 대해 무능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상을 만들고 우상이 자신이 기대하는 힘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도 역시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냄새를 맡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상태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 우리가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는 모든 것들도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해주는 힘과 능력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 중심에 자본, 즉 돈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돈을 힘없는 무기력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돈이 곧 힘이라는 자본주의적 체제 속에서 신앙 또한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들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영적 무감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한 것은 자기 몸에 대한 문제입니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항상 몸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인간이 헤어날 수 없는 본성은 현재의 자기 몸에 만족하지 않고 늘 자기 확대를 꿈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부패성입니다.

 

 

하와가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에 미혹되었을 때 그는 선악과에서 절대적 가치를 보게 됩니다. 선악과를 보면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들어야 했지만 인간의 눈과 귀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닫혀 있었고 대신 마귀의 미혹에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죽음을 간과한 채 자신의 가치 향상에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선악과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힘이고 능력일까요? 사실 우리는 ‘아니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매일 접하게 되는 것은 돈이 곧 힘과 능력이 되어 세상을 움직이는 현실을 목도하고 실제로 접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오히려 믿음이 나약하고 무능한 것으로 다가오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 것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현재의 부요와 평안이라는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우상을 수단화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상 숭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불교나 힌두교 등 다른 종교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성전에 우상을 두었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섬긴다는 우리 마음에 우상을 두고 있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상은 생명에 있어서는 무기력합니다. 이처럼 세상이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생명에 있어서는 무기력함을 아는 것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고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된 사람입니다. 절대적 가치를 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기준을 두고 찾기에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 가치로 존재하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이유가 무엇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우리에게 어떤 사건이 되었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에 대해 쉬지 않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생명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을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보게 되면서 예전에 가치 있던 것들이 무능력한 것으로 여겨지고 대신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모든 가치를 두게 됩니다. 이것이 눈이 있어 보게 되고 귀가 있어 듣게 되는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서 듣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들을 살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생명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살기 위해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가치 있는 것을 좇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는 길의 방향조차 가늠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반역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런 이스라엘 앞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하시는데 그것은 “너는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네 포로의 행장을 밖에 내놓기를 끌려가는 포로의 행장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들의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4절)는 것입니다. 이처럼 에스겔에게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포로 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는 것은, 에스겔이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이스라엘이 보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혹 생각이 있으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3절).

 

 

에스겔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 전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러 나라로 흩으시고 포로 되게 하시기 전에 먼저 에스겔로 하여금 포로의 행장을 꾸리게 하여 포로 되어 가는 자처럼 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포로로 사로 잡혀갈 것을 보이시는 징조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에스겔의 행동을 본 이스라엘이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에스겔을 행동을 보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혹 생각이 있으리라고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에스겔의 행동에서 무엇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늘 하나님의 기대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자 하시고 기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 오직 자신이 기대하는 것만 찾고 얻기 위해 행동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힘든 일이 주어지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포로의 행장을 꾸리게 하시고 포로 되어 가는 자 같이 하게 하신 행동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있고 보게 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는 족속이며 따라서 흩으시고 포로 되어 끌려가는 징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에스겔의 행동에서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에도 에스겔의 행동을 기억하고 자신들의 무지함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셔서 하루속히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의 말에 헛된 희망만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의 행동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에스겔의 행동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자신들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 전혀 없다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괜한 행동을 하게 한 것일까요? 하나님께 괜한 일은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백성의 유익과 생명을 위해 일으키시는 일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16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이 이르는 이방인 가운데에서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 가운데로 흩어버린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이 남기신 소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쌓이고 쌓인 악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에스겔의 행동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남겠지만 하나님이 남기신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에스겔을 징조로 세워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자신들의 악함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수의 사람이 누리는 유익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가증한 일을 자백하는 사람입니다. 죄를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자신을 살게 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며 생명을 얻는 축복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신자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크고 많은 신앙적인 행동을 하면서 의를 쌓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가증함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의 행동에 스스로 속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신자로 하여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미혹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멸망 받아야 할 가증한 존재라는 것이고 이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은 세상이나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적이며 신자는 이 기적을 안고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를 자랑하는 길로만 가고자 하는 소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로 사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없는 생각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면서, 세상이 구하지 않는 것을 구하는 자로 살기 때문입니다. 몇 사람을 남겨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들이 이르는 이방인 가운데에서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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