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5.02 20:15

(26강) 묵시와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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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2:21-28http://onlycross.net/videos/eze/eze-12212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1. 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2.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하는 너희의 이 속담이 어찌 됨이냐

23.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 사람이 다시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

24.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라

25.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고 응하리라 반역하는 족속이여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고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26.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7.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말이 그가 보는 묵시는 여러 날 후의 일이라 그가 멀리 있는 때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하느니라

28.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설교>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있었던 속담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22절)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주 흔하게 나타나는 냉소적 표현입니다. 여러분도 이해하셨겠지만 이 속담은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의 예언이 전혀 성취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의 성취가 너무 지연되어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의미로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게 합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고 성취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예언은 있으되 성취되는 시간이 지연됨으로 해서 예언으로서의 힘이 사라지고 결국 죽은 말씀으로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며 성취되는 예언만이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흘러도 예언이 성취되지 않자 자연히 예언을 신뢰하지 않게 되고 냉소적인 태도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도 말씀에 대해 이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우리가 주지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 말은 우리 역시 말씀에 대해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3-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목전에서 포로 되어 끌려가는 자 같이 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징조가 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사로잡혀 갈 것을 보여주는 징조이고 그것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묵시였습니다. 묵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계시하신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묵시는 현재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그대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늘이라는 현재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묵시를 바라봤습니다. 묵시에 대한 세상의 반응이 그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오늘 성취되지 않은 묵시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고 비판적이며 냉소적인 태도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묵시에 대한 그들의 속담 역시 에스겔을 통하여 선포된 심판의 말씀에 대해서 불신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에스겔이 보여준 징조에 대한 반응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묵시에 대한 반응 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묵시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묵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인해 묵시 자체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2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반역하는 족속 이스라엘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러한 반응을 보이며 그들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묵시에 대해 속담으로까지 만들어 무시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고 응하리라 반역하는 족속이여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고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25절)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예언 자체를 여러 날 후의 일, 즉 멀리 있는 때에 대한 예언으로 치부했습니다(27절). 오늘이든 내일이든 금방 일어날 일이 아니고 언제 있을지 알 수 없는 먼 훗날의 일에 대한 묵시이기 때문에 관심 둘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 하나님은 다시금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28절)는 말씀으로 경고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묵시를 묵시로 받아들일 의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묵시가 이루어질 날은 아주 더디다고 생각하기에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먼 훗날의 일로 치부하고 있는 그들에게 더디지 않고 반드시 응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또한 효력 없는 묵시로 취급될 것이 뻔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에스겔 선지자를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지금 당장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에 대해 언급한다는 이유로 반발할 것이 뻔합니다.

 

 

세상은 항상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을 듣기 원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로 세상의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멸망과 심판에 대한 이야기는 달갑지 않고 듣기 거북한 내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심판이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보다는 현실을 좀 더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심판과 멸망이라는 듣기 거북한 말보다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만사형통하는 복을 받고 평안을 누리며 장수하게 됩니다’라는 말이 더 마음을 가볍게 합니까? 과연 어떤 말이 참된 하나님의 묵시일까요?

 

 

성경은 분명히 심판과 멸망을 하나님의 참된 묵시로 선포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참된 묵시는 더디고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현재의 삶에 유리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묵시와 허탄하고 거짓된 묵시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참된 묵시를 불신하는 반역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사도신경에는 예수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잘 살 것을 믿는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이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을 고백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묵시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묵시는 더디 이루어질 일로 취급되면서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하신 말씀처럼 묵시는 반드시 응하게 됩니다. 묵시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미 이루어진 현재의 일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묵시 안에서 산다면 심판은 더디 오는 것이 아니고 멀리 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오늘 이루어진 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자는 역사 세계가 아닌 묵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 1:11절에 보면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것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빠른 시일 내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예수님은 오시지 않은 것 때문에 재림 신앙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이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재림에 대한 긴장감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현실은 재림, 심판, 멸망과 상관없이 육신의 편함과 행복으로만 연결되어 살아갈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묵시를 제대로 보고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비록 심판이 이르기 전 평안의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도록 진노하게 하신 자신들의 패역함을 살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회개하고 애통해 하며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구했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 나의 백성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 아래 있는 심판의 존재에게 희망이 되는 말은 심판의 선포입니다. 반대로 희망으로 여겼던 평안과 복에 대한 말은 오히려 그들을 심판에 붙들어 놓는 저주의 말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평안과 복을 내용으로 하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결론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더디 오실 것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계 22:7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고, 12절에서도 역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속히 오신다는 말씀에 대해 전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디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생전에 예수님이 오시겠나?’라는 의문과 불신까지 자리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은 더 이상 묵시가 아니라 의미 없는 관념으로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시를 속담으로 대하는 이스라엘과 동일한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속히 오신다고 했는데 왜 아직 오시지 않는 것일까요?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시고 몇 년 후에 오셔야 속히 오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백년 후에 오셨다면 속히 오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 해도 예수님이 오신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백년도 더딘 세월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고 시간에 매이지도 않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묵시에 시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속히 오신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마치 죽은 자에게는 시간이 의미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자는 세상의 시간관념과 상관없는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속히와 더딤의 구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갔기에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속히 오신다는 것은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반드시 오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더디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자에게 예수님이 오시는 일이 더딘 일이겠습니까? 죽은 자에게는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더디다는 느낌 또한 없습니다. 오늘까지 오시지 않는 예수님이 설사 지금부터 만년 후에 오신다고 해도 죽은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오늘 끝날지 내일 끝날지 알 수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오심은 바로 오늘의 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묵시 세계를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묵시 세계를 보지 못하고 현실만을 바라봄으로 등장하는 것이 24절의 허탄한 묵시와 아첨하는 복술입니다. 하나님은 묵시를 응하심으로 허탄한 묵시와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묵시의 세계에서 허탄한 묵시와 아첨하는 복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허탄한 묵시와 아첨하는 복술은 헛되고 거짓된 예언을 가리킵니다. 렘 14장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죄와 재앙에 대해 경고했을 때 다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이 이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확실한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렘 14:10-14).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예언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짓 예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목으로 예언했지만 거짓 계시고 점술이었고 헛된 말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허탄한 묵시고 아첨하는 복술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백성이 원하는 것을 반영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명목으로 말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세워서 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 되어 사로잡혀 갈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묵시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고 되어졌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묵시 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평안케 할 것이고 복을 줄 것이라는 모든 말은 거짓된 예언이고 허탄한 묵시이며 아첨하는 복술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허탄한 묵시, 아첨하는 복술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세상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여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계 22:7절에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주일 지키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일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주일을 잘 지키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보고 있던 신자들이 하늘나라로 가고 상을 받는다는 뜻일까요?

 

 

복이 있다는 것은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예수님이 오셔서 함께 하시고 다스리시는 묵시의 세계로 살아가는 신자가 복이 있고, 이러한 복이 있는 신자가 예언의 말씀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면 그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딘 일은 없습니다. 다만 번복되지 않고 취소되지 않으며 반드시 성취될 일만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모든 현실을 하나님의 묵시가 이루어진 현실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질 것이고 오늘날 살아가는 현실에서 가장 복된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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