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5.16 19:50

(28강) 평강의 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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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3:8-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1308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0.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11.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몰아치리니

12.그 담이 무너진즉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냐 하지 아니하겠느냐

13.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을 퍼붓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어리로 무너뜨리리라

14.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허물어서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5.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모두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16.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에이레네’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습니까? 기독교 단체의 이름, 또는 교회에서 성가대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헬라어로 평강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며 평안, 평화, 화평, 화해, 화목 등의 뜻으로도 번역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평강’이란 뜻의 구약 히브리어인 ‘샬롬’과도 같은 의미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평강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걱정이나 탈이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샬롬을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궁극적으로 개인, 공동체, 가족과 민족 등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며 안전한 상태로 존재하는 의미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보면 샬롬이나 에이레네 모두는 같은 의미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평강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강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평강을 가정과 교회와 나라가 걱정이나 탈이 없이 평안하게 잘 지내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말할 때도 그 같은 평안에 대한 기대감이 담긴 용어로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이 평안하지 못할 때면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거리감이 있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겔 8장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에스겔을 성전으로 데려가셨을 때 에스겔은 그 곳에서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사방 벽에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려 놓고 손에 향로를 들고 그 앞에 서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는 말로 불평 한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장로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평안의 상태에 있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을 가진 것입니다. 이들이 생각하고 원했던 평안이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구하고 원하는 평안과 다르지 않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평안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개는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는 징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평안하면 죄를 범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했다는 증거이고 평안하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는 등 죄를 범한 증거라는 의미가 됩니다. 과연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걱정과 탈이 없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허탄한 묵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심령이 기대하고 원하는 바를 따라 말하는 것이고 거짓된 점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그 같은 평안이 주어질 것을 원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허탄한 묵시, 거짓된 점괘라 할지라도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걱정과 탈이 없는 평안의 상태를 행복으로 이해하고 그 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사람들의 당연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욕망에 부합하여 평강을 예언하는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16절에 보면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강이 있다고 허탄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평강이 없다는 것은 바벨론으로 인해 평강이 깨어진 상태를 뜻하기 보다는 예루살렘에 평강이 없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때문에 예루살렘에 대하여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예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한 자가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허탄한 묵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평강이 없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기에 그에 대한 징벌의 차원에서 내려지는 것일까요? 물론 징벌의 의미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징벌 자체가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징벌의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평강이 없게 하셨다면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내려놓을 때 다시 평강을 회복시켜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은 단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교훈이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백성 되기를 원하십니다. 9절의 끝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민족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고 그 여호와를 섬기고 높이는 참된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면 하나님은 허탄한 것을 말하는 선지자들을 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9절에서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평강이 없게 하셔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평강을 말하는 자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릴 복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백성의 공회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붙드시고 하나님이 관리하시는 백성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붙들려 하나님의 관리를 받는 거룩한 관계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등록되지도 못하게 하시겠다는 뜻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고 일컫는 참된 이스라엘 백성으로 등록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벨론 포로 된 백성들에게는 회복을 의미하는데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누리게 하시는 회복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말씀드린 것처럼 허탄한 것을 말하고 거짓된 것을 점치며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하는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허락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참된 복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평강의 묵시를 예언하는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평강으로 간주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평강이 임하여 걱정과 고통과 탈이 없이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회칠한 담으로 말씀하십니다(10절).

 

 

그리고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몰아치게 하셔서 담이 무너지게 하시고 “칠한 회가 어디있느냐”라는 말을 듣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당장은 듣기 좋은 말이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려서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는 말이라 해도 그 모두가 허탄하고 거짓된 말이었음이 드러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허탄한 묵시를 말하는 자들을 치시는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강이 있다’는 듣기 좋은 말이 실상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말이고 담을 쌓을 때 회칠을 하여 견고하게 보이게 하는 것처럼 헛된 속임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강이 없다 하신 그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평강이 있게 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바램이고 생각입니다. 평강의 묵시를 말한 선지자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도 거짓 선지자들의 평강의 묵시가 진리로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우리의 모든 생각을 깨뜨리시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서 평강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고 일컫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히려 평강이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간이 원하는 평강을 제공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기 욕망을 따라 세상의 평강을 제공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그들이 곧 하나님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할 자들이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외적 조건의 평강을 누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곧 허탄한 묵시에 빠지는 것이고 거짓된 점괘에 미혹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엄중한 말씀을 무시하기 십상입니다. 성경의 내용보다는 평강을 누리는 현실이 더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묵시를 무시하고 현실에 매어 살아가는 실상입니다.

 

 

평강이 없다는 것은 평강을 주지 않고 항상 걱정과 염려 속에 살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참된 이스라엘은 세상이 추구하는 평강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비록 평강이 없다 해도 하나님과의 신뢰의 관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든 상황에서 다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며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롬 16:20절을 보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하고 그 외 여러 곳에서도 평강의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이 추구하는 평강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세상이 추구하는 평강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허탄한 묵시에 지나지 않은 평강의 묵시가 나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평강을 위한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평강이 없다고 하신 하나님이신데 평강을 위한 하나님은 또 무슨 말일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의 평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강은 별 탈 없이 평온한 상태를 말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신자는 십자가로 완성된 은혜의 장막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로 회복된 평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몇 주간 말씀드린 묵시의 세계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로 완성된 은혜의 장막으로 끌려간 신자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진다고 해도 그리스도로 완성된 평강만큼은 놓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동안 누리는 세상의 평강보다는 이미 완성된 영원한 평강을 누리는 것이 더 복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평강의 묵시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평강과는 전혀 상관없는 십자가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평강인 것입니다. 이 평강을 사도 바울이 알았기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저주에 갇힌 자입니다. 당연히 지옥가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가 없기에 어떤 죄도 우리를 또 다시 저주로 끌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완성된 평강입니다. 이 평강으로 신자는 기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세상에 없는 행복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용하는 전도 문구처럼 예수를 믿으면 평강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추구하는 평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완성된 평강이 우리를 전혀 생소한 행복의 세계로 인도하고 그 행복을 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으로 인해서 십자가의 길을 기쁘게 가게 되는 그들이 평강의 묵시를 사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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