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6.20 18:45

(33강) 존재의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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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6:1-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16011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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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3.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

4.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5.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6.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7.내가 너를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8.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9.내가 물로 네 피를 씻어 없애고 네게 기름을 바르고

10.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11.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목걸이를 목에 걸고

12.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13.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

14.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설교>

 

대개의 신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해 주신다면 실패 없는 성공의 인생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내용은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인간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인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의 헛된 기대와 환상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이끌어 기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에까지 우상을 들이고 경배하는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시면 평안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이것을 인간의 자기기만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양심에서 벗어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로 설명되는 자기기만에 의해 자기의 악함을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은 성전에까지 우상을 들이고 경배하는 자신들의 악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진 채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에 의한 평안에 기대를 둔 것입니다.

 

 

렘 17: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라고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 부패하고 거짓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기기만 때문입니다. 아담이 자신의 죄를 하와 때문으로 변명하고 하와는 뱀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처럼 욕심에 의한 자신의 죄악 된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의 인간은 항상 죄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죄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의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기기만에 의해 종교 행위가 자기의 악함과 믿음 없음을 감추는 가면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기만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인간은 허상에 갇힌 채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고집하고 주장하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히 하시는 일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그 기만을 무너뜨리심으로써 인간이 본질, 즉 근본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사랑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공과 재물의 복이 아니라 심판으로 나타난다는 이 말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바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자기기만이 깨어지고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자신의 근본을 제대로 보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심판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심판은 죽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의 신앙 현실은 세상의 풍요와 성공으로 인도받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도 받는다는 사실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물론 심판, 죽음 자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를 우리가 믿는 허상과 거짓된 것에서 벗어나게 하고 참된 믿음에 있게 하기 위해 죽음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라고 말합니다. 가증한 일을 알게 하라는 것은 예루살렘이 가증한 일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은 성전에까지 우상을 들여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는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기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기만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힘으로 자기기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고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의 근본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철저히 무너뜨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가 헷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은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이 결혼하여 태어난 족속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셈의 자손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가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가 헷 사람이라는 말을 할까요? 이것은 실제로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이 결혼하여 낳은 자손이 그 뿌리라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다른 이방 나라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모리와 헷은 노아의 세 아들 중의 하나인 함의 아들 가나안의 자손입니다. 그렇게 보면 아브라함의 조상은 셈이기에 아모리 자손 헷 자손과 남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의 자손이라고 하면 이방인으로 생각하고 셈의 자손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특별한 자손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본다면 셈과 함은 각기 구별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었다면 셈 또한 함과 다를 바 없는 족속으로 취급될 것이고 셈의 자손에 속한 아브라함 또한 아모리 족속, 헷 족속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하시는 의도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 출발이 이방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것도 비록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그 민족의 의미가 시작된다고 해도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났을 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가나안 땅에 있던 족속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구별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탯줄을 자른 다음 물로 목욕을 시키고 소금과 기름을 바른 후에 강보로 싸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인데 이 아이는 날 때부터 마치 이방인의 자식처럼 취급되어 누구에게도 불쌍히 여김 받지 했고 태어나던 날에 천하게 여겨져 들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물론 예루살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근본은 그들이 스스로를 자랑하고 높이는 것과는 달리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천한 신분이의 사람일 뿐이고 심지어는 불쌍히 여김 받지도 못하고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버려진 처지였을 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버려진 아이 곁을 지나가는 나그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버려진 채 있는 아이가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고 말합니다. 피투성이로 버려진 아이는 이미 죽음의 상황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아이를 ‘살아있으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심으로 아이를 살리신 것입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죽음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루살렘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은 피투성이로 버림받은 아이를 심히 아름다운 여인으로 키우시고 사랑을 할 만한 때가 되자 그를 하나님의 옷으로 덮어 벌거벗은 가리고 맹세하고 언약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결국 피투성이로 버려졌던 아이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인해 잘 자라게 되고 종국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신부인 왕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출신 성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4절을 보면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화려함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없는 영화가 예루살렘의 화려함이 되어 이방인 중에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누리게 된 화려함은 예루살렘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제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순종한다고 해도 그들의 힘으로는 화려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버림받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점은 예루살렘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은 결코 이방인보다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내세울 것 없고 저주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자신들의 근본인 비참함을 잊어버리고 화려함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비참한 아기와 같은 자신들을 살리시고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셔서 왕후의 지위까지 오르는 영화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도외시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야 말로 자신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감추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만 자랑하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자기기만을 깨뜨리시고 자기 현실과 근본에 대해 자각하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영화로운 존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하심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참된 예루살렘으로 세우시기 위해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철저히 죽이시는 작업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나타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본질을 아는 것인데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인간은 자기 본질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좋고 화려한 것만 드러내어 스스로를 높이는 일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좋은 것, 화려한 것, 그 모든 것이 비참한 처지의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살려주시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신 은총으로 인한 것임을 잊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과 자비하심이 드러나고 자랑되고 증거 되어야 하는 모든 일에서 자기 자존심을 세우고 자긍심을 고취하는 일에 몰두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존재의 근본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존재 근거가 자기에게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내세워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는 누구 앞에서도 내세울 수 없는 비참한 것이고 버림받은 존재라는 사실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신 것이고 왕후라는 화려함까지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근본임을 안다면 우리가 할 일은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감사하고 높이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책임이며 영광인 것입니다.

 

 

여러분께 남보다 낫다고 내세울 수 조건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의 자긍심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여러분의 본질은 가증한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의 가증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으로,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교회를 다닌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존재 기반을 자신에게 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자기기만을 심판하시고 자기 죽음을 확인하는 자리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기어코 우리의 죽음을 확인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고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처럼 자신의 근본이 무엇인지는 모른 채 자기를 위해 평안만을 구하는 것을 거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존재 근거를 자기에게 두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나의 죽음을 확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를 근거로 하는 삶을 내려놓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버림받은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근거로 하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벌거벗은 자로 하나님께 나오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버리십시오. 대신 하나님을 존재 근거로 하는 새로운 삶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참된 영화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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