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6.27 16:20

(34강) 음녀의 행위

조회 수 368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겔 16:30-34http://onlycross.net/videos/eze/eze-16303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0.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이 모든 일을 행하니 이는 방자한 음녀의 행위라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약한지

31.네가 누각을 모든 길 어귀에 건축하며 높은 대를 모든 거리에 쌓고도 값을 싫어하니 창기 같지도 아니하도다

32.그 남편 대신에 다른 남자들과 내통하여 간음하는 아내로다

33.사람들은 모든 창기에게 선물을 주거늘 오직 너는 네 모든 정든 자에게 선물을 주며 값을 주어서 사방에서 와서 너와 행음하게 하니

34.네 음란함이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함은 행음하려고 너를 따르는 자가 없음이며 또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값을 줌이라 그런즉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니라

 

 

<설교>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은 누구에게도 불쌍히 여김 받지 못하고 천하게 여겨져 들에 버림받은 존재로 소개됩니다. 그처럼 버려져 피투성이가 되어 버둥거리는 것을 하나님이 살리시고 자라게 하셨으나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으로 수치스런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의 옷으로 가려주시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셨고 결국 왕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하신 그들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결국 예루살렘도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천한 존재였음이 드러났습니다. 날 때부터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 천한 존재였을 뿐인 그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왕후라는 지위까지 오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출신성분이고 존재의 근본입니다.

 

 

천한 존재로 버려져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고 왕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면 예루살렘은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자리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왕후라는 신분을 초월할 수 있는 존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왕후의 신분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권세로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왕후로 삼주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모든 은혜와 축복의 역사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의 화려함은 세상의 것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히신 영화입니다. 하나님이 입히신 영화로 화려함이 온전해 졌기에 예루살렘에 따로 추구할 화려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천한 신분에 지나지 않은 자신들을 왕후의 신분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이 입히신 영화로 감사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15절)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들을 왕후로 삼아준 왕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화려함을 믿고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고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행음하는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천한 존재로 버림받은 여자 아이를 자라게 하고 왕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배신당한 남편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15절부터의 내용을 보면 예루살렘이 음행을 행한 것이 중심이 되어 전개됨으로 왕후의 신분에서 음란한 음녀로 전락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왕후라는 영화로운 신분의 사람이 되게 하였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으로 음행하는 일에 사용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음행은 성적인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 것을 두고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고 이방인의 우상을 끌어 들이고 섬기는 것을 아내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팽개치고 다른 남자에게로 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빗대어 음행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부터 보면 단순히 ‘너희는 우상을 섬기는 음행을 행했다’라는 말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세하게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행위를 음행으로 드러내어 그들이 누구인가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으면서도 우상을 섬기는 음행을 행하고 하나님을 배신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께 입은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자’라는 말로 쉽게 결론지을 내용이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현대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신앙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신자라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에 순종할 것인가를 물으면 답을 하지 못합니다. 겨우 내세우는 것들이 선교와 전도, 교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 그리고 기도와 십일조 등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순종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 안에 우상을 두었습니다. 하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것을 원했고 다른 것을 마음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성전에 우상을 끌어 들인 것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2,1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섬김을 빌미 삼아 늘 다른 것을 요구하고 마음에 두었을 뿐입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성전에서 제사하고 제물을 바쳤다 해도 그들은 이미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에는 실패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 기독교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는 말은 교회라 이름 하는 어느 곳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한 말을 반복함으로써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을 신앙하고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만 섬기는 일에 이미 실패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일에 실패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큰소리치며 설쳐대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음행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대접하고 우리에 대해 목적하시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으로 인해 나타나는 갈등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보다 세상이 알아주는 좋은 것으로 자신의 화려함과 명성을 드러내겠다는 의도로 하나님께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충만이 되고 감사가 되고 은혜가 되는 신자로 존재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것에 굴복하고 무릎 꿇은 자로 하나님께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것을 예루살렘의 음행과 우상 섬김에 대해 낱낱이 드러내는 말씀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루살렘이 음행을 하고 우상을 섬겼다면 길게 이야기 할 것 없이 그 죄를 선포하고 심판해 버리면 됩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스라엘에게 다른 희망은 없을 것이고 그들의 역사 또한 이미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계속 끌어가십니다. 그것은 63절에서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놀라고 부끄러워 다시는 입을 열 수 없는 존재로 세우는 것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30절에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이 모든 일을 행하니 이는 방자한 음녀의 행위라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약한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음행하는 여인으로 질책합니다.

 

 

이들의 음녀의 행위는 23절부터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다리를 벌려 심히 음행하므로 그들의 아름다움을 가증하게 하였고(25절), 애굽 사람과도 음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앗수르 사람과 행음하고 그래도 부족하여 장사하는 땅 갈대아에 까지 심히 행음하였으면서도 아직도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애굽과 앗수르 등 강대국들에게 조공을 바쳐가며 동맹을 맺고자 했던 것을 행음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은 무엇을 위해 행음하였고 무엇 때문에 행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행음하는 여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창기입니다. 그런데 31절의 “네가 누각을 모든 길 어귀에 건축하며 높은 대를 모든 거리에 쌓고도 값을 싫어하니 창기 같지도 아니하도다”는 말씀을 보면 창기 같지 않다고 합니다. 창기는 음행을 한 후에 돈을 요구하게 되는데 예루살렘은 창기와 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값을 싫어했던 것입니다.

 

 

사실 창기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것은 쾌락을 위해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생존과 연결되어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값을 싫어하는 창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오히려 반대로 값을 받지 않고 값을 주면서 사방에서 와서 자기와 행음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을 32절에서 “그 남편 대신에 다른 남자들과 내통하여 간음하는 아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강대국들에게 선물을 바쳐 가며 동맹을 맺고자 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을 다른 남자와 내통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그토록 이방 나라에 목을 매는 것입니까? 이들의 형편을 사 30: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힘 있는 강대국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남편이 되는 하나님의 세력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그늘 아래 있는 것으로 안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력, 하나님의 그늘을 바로보다 애굽보다 더 못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형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활동은 활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모습일 뿐 속사정은 세상에 장악된 채 세속성만 강하게 노출되어 있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를 관심 두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마음이 끌림 받아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열망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신앙은 하나님이 행하시고 베푸신 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양 손에 가득 들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화된 교회며 신앙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입힌 영화로 그 화려함이 온전해 졌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 역시 예루살렘처럼 불쌍히 여김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천한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으로는 하나님께 속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옷으로 덮으셨습니다. 더러움과 수치를 가리시고 화려함이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온전케 하신 화려함은 세상이 추구하는 화려함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이 온전케 하신 화려함은 하나님이 입히신 영화로 인한 것이기에 우리 손으로 스스로를 치장하여 화려해지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신자와 신자 아닌 자가 드러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으로 영화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감사하지만 신자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이 자기만족이 되지 않기에 자기 손으로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이것이 이방인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이러한 방식에 어울리고 함께 하며 세상의 화려함으로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음란한 행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 남편 대신에 다른 남자들과 내통하여 간음하는 아내로다”(32절)는 질책이야 말로 오늘 우리 자신을 향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화를 입히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 안에서 우린 이미 영화로운 자라는 화려함이 있는 자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관념이 되고 하나의 이상으로만 전락된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화려함을 좇아갑니다. 예배당의 화려함에 목을 매고 있고 자기 신앙도 화려하게 만들고자 애씁니다. 신앙행위로 말하는 모든 것들을 결국 자기 신앙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것들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남편 대신에 다른 남자들과 내통하여 간음하는 음녀의 행위로 규정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였던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런 우리가 영화로운 존재로 여김 받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무엇이 우리를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옷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답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이미 부족함이 없는 화려한 자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해야 할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88 에스겔 (21강) 뿌려진 숯불 신윤식 2015.03.22 4064
587 에스겔 (22강) 일하시는 하나님 신윤식 2015.03.28 4154
586 에스겔 (부활절)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신윤식 2015.04.05 4061
585 에스겔 (23강) 악한 꾀 신윤식 2015.04.12 4028
584 에스겔 (24강) 성소가 되리라 신윤식 2015.04.19 3834
583 에스겔 (25강) 남기신 몇 사람 신윤식 2015.04.26 3728
582 에스겔 (26강) 묵시와 속담 신윤식 2015.05.02 4156
581 에스겔 (27강) 허탄한 묵시 신윤식 2015.05.09 3773
580 에스겔 (28강) 평강의 묵시 신윤식 2015.05.16 4048
579 에스겔 (29강) 영혼을 사냥하는 자 신윤식 2015.05.23 3883
578 에스겔 (30강) 내 백성으로 삼고 신윤식 2015.05.30 3689
577 에스겔 (31강) 재앙과 위로 신윤식 2015.06.06 3895
576 에스겔 (32강) 무가치한 포도나무 신윤식 2015.06.13 3734
575 에스겔 (33강) 존재의 근본 신윤식 2015.06.20 3825
» 에스겔 (34강) 음녀의 행위 신윤식 2015.06.27 3687
573 에스겔 (35강) 벗은 몸 신윤식 2015.07.04 3615
572 에스겔 (36강) 영원한 언약 신윤식 2015.07.11 3661
571 에스겔 (37강) 하나님의 수수께끼 신윤식 2015.07.18 3611
570 에스겔 (38강) 높은 나무를 낮추고 신윤식 2015.07.25 3567
569 에스겔 (39강) 잘못된 속담 신윤식 2015.08.01 417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