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6:10-12http://onlycross.net/videos/co1/co1-161012.mp4
<본문>
10.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설교>
우리가 복음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복음을 듣고 배워서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와 지식만 있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길로 가지 않고 복음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복음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여러분께 누누이 말씀드렸던 것이 복음을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복음을 아는 신자로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면서‘나는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말하는 것으로 자기 가치를 챙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말하기는 하지만 복음의 가치보다는 ‘나는 복음을 안다’는 자기 가치에 마음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안다 하고 죄인이라는 말을 열심히 하는데도 현실은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신자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경계와 점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성경이 증거 하는 참된 복음의 세계로 들어가서 자신을 봐야 합니다. 복음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듣고 배우게 되는 것은 ‘오직 복음만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세계에서 결코 변하지 않을 현실입니다. 복음만이 가치 있는 현실의 세계에서‘복음을 아는 나’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해서 복음의 가치가 더 향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복음을 아는 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내가 말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동조해주기를 원합니다. 이 또한 누군가에게 복음을 말하게 되는 것을 하나의 우월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말하되 복음의 세계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도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와 광채를 가리는 사단의 일에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러한 사탄의 일을 정확히 구분하고 간파하면서 복음의 길로 가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사단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할 정도로 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이 문제에서는 누가 더 나고 못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에 대해 둔하고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 담긴 복음의 내용을 깨닫고 이해하며 머리에 담아두게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것은 단순히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과의 관계에서 복음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끌어가고 그 세계를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없다면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복음을 말하지만 말고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 말을 그렇게 들으셨다면 여전히 마음이 자기 가치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복음을 아는 자가 되라거나, 복음을 알기 위해 힘쓰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세계에서 나의 개인적 가치는 헛된 것이고 의미 없는 것임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 가치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복음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복음을 아는 나’로 드러나고 인정받음으로써 복음을 아는 무리들 속에서 나 또한 복음을 아는 가치 있는 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탄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사탄의 도구가 되어 주를 대적하는 악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습관적으로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의 고백이며 복음의 활동에 의한 열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의 세계에 있는 것입니까? 주님 앞에서 복음을 아는 자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이것을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아볼로에 대해 말하는 내용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10-12절)는 당부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런 말을 극히 개인적인 일로 보기 쉬습니다. 바울이 아끼던 디모데이기 때문에 디모데가 고린도에 가게 되면 잘 대해주라는 부탁의 말을 하는 것이고, 역시 많이 가까웠던 아볼로가 기회가 되면 고린도에 가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역시 대수롭지 않은 내용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본문을 바울의 개인적인 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바울과 관계된 디모데와 아볼로에 대한 말이지만 복음의 세계에서는 복음의 관계에 있는 모든 신자에게 보편적인 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예수에 대해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는 그 때를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가령 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을 때 누군가를 붙들고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해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가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보고 그 외에 사적인 삶은, 말 그대로 사적인 삶이기에 중요성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바울이나 우리에게서 친히 일하신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에게도 개인적인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선한 행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일으키시는 모든 일과 사건이 복음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로 보일지라도 주께서 사소한 일에도 함께 하시면서 복음을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때문에 무엇보다 우리의 생활을 복음 전하는 일과 사소한 일로 구분하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과 관계없는 사소한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예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고, 복음의 세계를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고린도에 가게 되면 디모데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조심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바울에게 돌아오게 하라고 합니다. 바울의 말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에서 멸시를 받을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염두에 두었기에 멸시하지 말고 두려움이 없이 교회에 있게 하라는 말을 남기는 것입니다.
행 16:1절에 보면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혼혈인 것입니다. 이것이 디모데의 약점일 수 있고 이것 때문에 멸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상 제물 문제로 충돌이 있었던 것이 하나의 예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디모데와 같은 경우는 유대인 신자, 이방인 신자 모두에게 배척받을 수 있는 입장이 됩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유대인도 아니고 헬라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딤전 4:12,13절을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말합니다.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쓸 때는 젊은 나이였습니다. 몇 살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한 것을 보면 어리다고 무시 받을 정도의 나이로만 짐작해 볼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디모데가 어리다는 것도 고린도 교회에서 멸시 받을 이유가 되긴 합니다. 디모데가 고린도에 가는 것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인데 나이든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어린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이도 적은 것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라는 반응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혼혈과 함께 어리다는 것이 멸시받음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나는 유대인이다’라는 시각에서 혼혈인을 보면 못마땅할 수 있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 듣고 배워야 할 어린 사람이 오히려 가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복음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을 디모데가 갔을 때 멸시 받지 않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디모데를 멸시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복음에만 모든 가치를 두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나는 유대인이다’‘나는 헬라인이다’는 것에 아무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서 이것은 당연합니다. 유대인, 헬라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라면 디모데의 아머니, 아버지가 누군가의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디모데를 멸시하지 말라는 말에는 복음에만 모든 가치를 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 됩니다.
만약 ‘사람은 다 똑같은 혼혈이라고 해서 멸시하면 안된다’‘나이가 나보다 적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된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인간의 도리일 뿐입니다. 즉 윤리, 도덕의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에 힘을 쓰면서 복음을 실천하고 복음으로 산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같이 주의 일을 힘쓴다면 디모데 안에는 십자가의 피의 은혜가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피의 은혜도 없이 주의 일을 힘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디모데 안에 피의 은혜가 자리한다는 그것만으로 디모데는 멸시가 아닌 존귀함을 받을 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관계되어 누구와도 함께 하게 되는 교회입니다.
아볼로에 관한 말도 복음만 가치 있다는 시각에서 보게 되면 복음에만 온 마음이 향한 사도로 복음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자유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준과 시각에서 드러나고 경험되는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파가 있었습니다. 고전 12:12절에서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나름 유명한 사람을 중심으로 파가 갈렸던 것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파가 갈렸다는 것은 교회가 사람에게 차이를 두었음을 의미합니다. 나름대로 자기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평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낫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하께 함으로써 자연히 분파라는 것이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볼로 파가 있었다면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서 꽤 유명인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었다면 아볼로를 견제하지 않았을거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볼로에게로 인기가 기울어진다면 상대적으로 바울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아볼로를 형제로 지칭하고 바울이 고린도에 없는데도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가라고 많이 권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와 교회에서의 입자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전혀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복음의 세계를 사는 바울입니다.
굳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복음을 말하고 가르치지 않는다 해도 아볼로를 형제라 하고 고린도로 가도록 많이 권했다는 한마디의 말에서 바울의 모든 관심사가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행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으로 다가와서 복음의 세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에 의해서 함께 하는 관계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서 십자가에만 모든 시선과 가치를 두는 것이 복음의 관계에 있는 것이고 이것을 형제라고 지칭합니다. 그래서 형제의 관계에서는 복음 외에는 다른 무엇으로도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복음의 세계에서는‘나는 복음을 안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의 세계에 있는 신자는 무엇도 자신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복음을 말하되 ‘내가 복음을 더 많이 안다’는 것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기도를 하되‘내가 기도 했다’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이 행한 것을 자신과 연결하게 되면 자연히 자기 가치를 높이는 것이 되고 결국 복음의 관계가 훼손되는 결과가 됩니다. 때문에 무엇이든 자신과 연결하여 자기 가치를 높이고자 한다면 그는 형제 관계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선 우리는 은혜의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하고 업적을 이룬다 해도 십자가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저주 받을 자일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관계는 함께 십자가만을 보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이러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선물한 것이 형제입니다. 형제라는 관계가 십자가로 이루어진 귀한 은총의 선물이기에 ‘나’를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관계로 함께 하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