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8.15 16:58

(41강)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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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9:1-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19011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너는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2.부르라 네 어머니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에 엎드려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3.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4.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5.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골라 젊은 사자로 키웠더니

6.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에 왕래하며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7.그의 궁궐들을 헐고 성읍들을 부수니 그 우는 소리로 말미암아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황폐한지라

8.이방이 포위하고 있는 지방에서 그를 치러 와서 그의 위에 그물을 치고 함정에 잡아

9.우리에 넣고 갈고리를 꿰어 끌고 바벨론 왕에게 이르렀나니 그를 옥에 가두어 그 소리가 다시 이스라엘 산에 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0.네 피의 어머니는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11.그 가지들은 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에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에서 뛰어나 보이다가

12.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매 그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더니

13.이제는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에 심어진 바 되고

14.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설교>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아주 특별한 실험을 하였습니다. 어떤 마을의 일정한 구역에 있는 각 집에 매일 만원씩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누어 준 다음 그 결과를 관찰 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날, 집집마다 들러서 현관에 만원을 놓고 나오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제 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 하면서도 멈칫 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둘째 날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셋째 날, 넷째 날이 되자 그 동네는 만원씩을 선물로 주고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두 번째 주 쯤 되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현관 입구에 까지 나와 돈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오는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언제 쯤 올 것인가 기다리게 되었고, 그 소문은 이웃 마을에까지 퍼졌습니다. 세 번째 주 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넷째 주가 되었을 때쯤은 매일 만원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실험 기간이 끝나는 한 달의 맨 마지막 날 그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쏟아졌습니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거나 화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을 거칠게 열고 현관까지 나와서 성난 목소리로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왜 오늘은 내 돈 만원을 안 주는 겁니까?" 하고 따져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만원을 받는 일은 어느새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글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현실을 봤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받은 것보다 부족하거나 받지 못했다 싶으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있는 것은 은혜와 사랑을 당연히 받아야 할 자기 권리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은혜와 사랑에 배불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교회 생활만 잘하면 은혜와 사랑은 무한 리필로 제공하는 하나님으로 인식되어 있기에 은혜와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은혜와 사랑에 배불러 있는 것입니다. 아무 상관없는 자신에게 만원을 놓고 가는 사람에 대한 의아함이 시일이 지나면서 사라진 것처럼 나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에 대해 의아함은 사라지고 당연함과 권리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우리의 탐심입니다.

 

 

교회는 은혜와 사랑을 팔아먹고 교인들은 돈을 내고 은혜와 사랑을 사서 자기 것으로 챙겨 은혜와 사랑이 당연한 권리가 돼 버린 현실에서 나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은혜와 사랑이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일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불만을 갖기도 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당연한 자기 권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불만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은혜와 사랑을 요구할 그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해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고 해서 권리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은혜와 사랑을 탐심으로 대한 것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들만이 은혜와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유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믿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통으로 가득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그들이 느낀 것은 하나님의 불공평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셔야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공평은 무엇입니까? 18:30절에 보면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잘한 것이 있으면 복을 주시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된다면 먼저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즉 의를 행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을 의를 행했는데 복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고 부당하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 의를 내세우고 항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인정하실 의는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평에 의해서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9장은 애가가 중심인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너는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하시는데 이스라엘 고관들은 뒤에 나오는 내용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의 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가는 죽음의 슬픔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유다의 운명을 내다보면서 유다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를 에스겔에게 부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를 에스겔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바벨론에 끌려 왔지만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아가게 하신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장송곡이라고 할 수 있는 애가를 부른다면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병들어 누워 있는데 누군가가 찾아와 장송곡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병든 자신을 아예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고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주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가수들도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를 주는 노래를 부르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누군가 어려움을 겪고 병든 이가 있으면 어떻게든 위로가 되는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가를 부르게 하십니다. 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향해서 애가를 부르게 하시는 것일까요?

 

 

지금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은 고통이 속히 끝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해방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착각입니다. 바벨론에서 해방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하기 이전 평화의 상태에 있었을 때 그들이 행복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화의 상태에서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의 우상을 섬기면서 항상 이방나라처럼 부강해지고 싶은 탐심에 갇혀 있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것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안도감일 뿐 또 다시 자신을 채우기 위해 힘쓰는 길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교정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애가를 부르게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네 어머니는 암사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암사자가 젊은 사자들 중에서 새끼를 길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암사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삼하 7:14-16절을 보면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인데 다윗의 집과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고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 계통의 왕위는 이 언약에 따라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암사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자들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당시의 왕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의 새끼 사자는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킵니다. 그리고 결국 이방민족들이 그를 공격하여 함정을 파서 잡아 애굽으로 끌고 갑니다. 이 사람이 바로 여호아하스왕입니다. 이 일 후에 암사자가 다시 새끼 사자 하나를 또 골라 젊은 사자로 키웁니다. 하지만 이 사자 역시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그의 궁궐들을 헐고 성읍들을 부숩니다. 이런 그를 이방이 포위하고 있는 지방에서 치러 와서 그물을 치고 함정에 잡아 우리에 넣고 갈고기를 꿰어 끌고 바벨론 왕에게 이르러 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여호아하스 왕위를 계승하여 11년을 다스린 여호야김왕입니다.

 

 

10절부터는 또 다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네 피의 어머니는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라는 말은 다윗 왕국 때의 유다의 번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말하는 많은 가지 가운데서 뛰어나 보인 가지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12절의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매 그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더니”라는 말은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하여 그 결과 자신은 두 눈이 뽑히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불에 타게 된 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들이 의미하는 것은 유다와 왕들, 그리고 백성들의 운명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14절의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는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부르는 애가이고 이 애가는 후에도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왕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자신들을 위해서 뭔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으로 인해 삶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왕을 향한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희망이 무너진 것이고 앞으로도 이스라엘을 행복하게 해 줄 강한 가지는 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영광의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헛된 꿈을 품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헛된 꿈을 품고 있는 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불만만 있을 것이고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자 했던 자신들의 악함을 직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부르는 애가가 자신들이 부르는 애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보고 스스로 자기 죽음을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원하는 강한 가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원하는 나라로 회복하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게 할 강한 가지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하지만 다윗 언약을 따라 오실 강한 가지는 있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는 강력한 권세와 능력으로 오신 참된 강한 가지이며 다윗 언약이 낳은 참된 사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에 힘 되는 것으로 일으킴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돈이 자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기고 돈이 있어야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살리는 참된 사자, 강한 가지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평강으로부터 멀어진 이유입니다.

 

 

내가 죽은 자임을 알고 힘을 가졌다고 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역시 죽은 자임을 안다면 세상 소유와 환경을 두고 하나님께 불공평하다고 할 수 없음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으로, 강한 가지로 오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인간의 탐심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간섭으로만 알게 됩니다. 인간의 탐심에 의한 은혜와 사랑은 모두 가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세상에서 힘 있는 자 되게 하고 부요하게 하는 은혜와 사랑은 십자가와 무관한 가짜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나의 죽음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드러나 알게 될 때까지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을 잘라내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며 나의 애가, 나의 장송곡을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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