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8.22 17:31

(42강) 내 이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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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0:1-9http://onlycross.net/videos/eze/eze-20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일곱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이스라엘 장로 여러 사람이 여호와께 물으려고 와서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3 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인자야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 너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의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5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내 손을 들어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노라

6 그 날에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7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8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

9 그러나 내가 그들이 거주하는 이방인의 눈 앞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눈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행하였음이라

 

 

<설교>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이라는 이 발상이 인간의 탐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말 할 것 없이 자신에게 함께 하시고 자신의 모든 인생길에 동행하시면서 삶의 행복을 이뤄주고 지켜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뜻과 소원에 따라 일하시는 분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고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모든 일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인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뜻과 소원을 이뤄주는 하나님은 성경이 아니라 인간의 탐심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일 뿐인데 이처럼 탐심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을 하나님으로 알고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기 때문에 믿음과 구원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과 인자하심 등등 하나님의 속성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왜곡되고 잘못 이해되면서 믿음이 아닌 종교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하면서 잘못된 신앙에 대해 책망하는 선지자의 말에는 늘 반발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바벨론 포로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왜 자신들을 그러한 재앙과 고통을 겪게 하시는지 답답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답을 얻어 보려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장로 여러 사람이 여호와께 물으려고 에스겔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묻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3절을 보면“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묻기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장로들의 관심이 여호와가 누구시며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만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배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전부한 채 오직 자기 인생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에만 뜻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은 옛날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내 손을 들어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5절).

 

 

또한 하나님이 맹세하시기를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고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너희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7절)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그들의 눈을 끄는 가증한 것을 버리지 않고 애굽의 우상을 떠나지 않는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에 따른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신 아름다운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신 이유를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눈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행하였음이라”(9절)고 말씀합니다. 가증한 일을 행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신 모든 일이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이 전통적으로 알고 있고 붙들고 있는 신에 대한 인식이 무너지게 됩니다. 인간의 신 인식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함께 하며 인간을 돕고 지켜주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신 인식에 의해 신앙이 형성되어 고착되었고 현대 교회 역시 이러한 신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을 위해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마 많이 생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해 일하신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라는 반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선택된 자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부르고 믿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자기 이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신비고 기적이며 하나님의 역사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위해 살까요? 정답은 간단히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삽니까?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산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식을 위한 것 같지만 속마음은 자식을 도구 삼아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 하는데도 불구하고 학원을 보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삽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것도 우상은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이고 그것이 곧 스스로를 더럽히는 가증한 일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자기를 위해 교회를 다니는데 자기를 위해 하는 모든 것을 가증한 것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여호와께 물으려고 선지자 에스겔을 찾아왔지만 물음의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여호와께 묻고자 하는 행위가 오히려 가증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묻기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찾고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장로들이 착각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찾아 묻고자 하면 언제든지 물을 수 있고 답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심으로 말씀을 듣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목적하신 곳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게 된 백성에게서 나오게 될 고백은 무엇일까요?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곧 가증한 것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진노가 마땅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로 인도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자기 인생 전부를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위한 내 인생은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모든 삶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가증한 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존재가 자신임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붙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이름을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가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가증한 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 것은 우리는 구원될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지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믿음의 중심 내용으로 세워두어야 합니다.

 

 

9절에 보면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눈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행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의 눈 앞에서 더럽히는 것이 될까요? 일단 이스라엘은 가증한 존재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쏟아 심판해 버리신다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역사 속에 이루시는 일이 무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한인 것이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증한 죄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심판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드러내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가증함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가증한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심판해 버리신다면 자신들의 무든 이유로 심판을 받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결국 심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억울하다는 반응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이 당연하다는 자기 입장에서 현재의 모든 형편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가증한 죄라고 했습니다. 이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특징은 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증한 일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모릅니다. 주일을 지키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모든 것이 실상은 자기를 위해 하는 가증한 일임을 모릅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신앙의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는 가증한 죄인일 뿐입니다’는 고백이 가능할까요?

 

 

성경은 우리의 죄를 죄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뜻을 세우시고 우리를 주관하시고 일하시지만 항상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내세우는 것이 가증한 죄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 죄를 죄로 알게 된 그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죄를 죄로 알게 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어떤 삶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모든 인생을 주관하심을 믿는다면 신자는 인생을 살면서 염려하고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염려와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보다 내 인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가증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천국에 있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되어진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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