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9.05 19:38

(44강) 하나님의 열심

조회 수 392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겔 20:40-44http://onlycross.net/videos/eze/eze-20404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41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42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43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44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죄가 있음으로 해서 신자가 받는 유익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죄를 무조건 자신에게서 잘라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말들이 공허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인간이 자신에게서 죄를 잘라낼 수 있을까요? 나무에서 가지를 모두 잘라낸다고 해도 나무가 살아있는 한 가지는 또 다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지구가 멸망해도 마지막까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벌레가 바퀴벌레라고 합니다. 그만큼 지독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지독한가 하면 머리가 없어도 10일간 살 수 있다고 하고 공기 없이도 45분 정도를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바퀴벌레보다 더 지독하고 끈질긴 것이 죄입니다. 물론 죄의 끈질김을 바퀴벌레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그만큼 이 세상에서는 죄의 끈질김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기로부터 죄를 잘라낼 수 없습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이 과연 가능한 것입니까? 그래서 기독교인으로서 짓지 말아야 할 죄를 실행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축소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것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자신에게서 잘라내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과연 하나님께서 세상에 여전히 죄를 남겨 두신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죄를 그냥 그대로 두고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죄 가운데 그냥 두신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만은 죄 없는 자로 살아가도록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신자조차도 죄 가운데 두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죄가 있음으로 해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유익이 있습니다. 죄가 유익한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동원하여 일하시는 일하심으로 인해 신자가 누리는 유익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과연 그 유익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에게는 그보다 좋은 세상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욕, 불의, 시기, 미움 그 어느 것도 없는 본래의 에덴동산의 상태 그대로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세우는 것에 뜻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죄를 허용하시고 지금까지 그대로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죄가 없다면 우리는 편안하겠지만 우리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죄로 인한 애통을 알 수 없고, 애통을 알지 못하니 죄를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과 감사를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도 알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의 나약함을 알지 못하니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 하지도 않게 됩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죄가 없으니 복음을 더 깊이 깨닫고 말씀을 온전히 지켜 행할 수 있게 될까요? 생각건대 말씀에 대한 아무 느낌도 없을 것입니다.

 

 

20장을 보면 인간의 죄가 참으로 끈질기게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장은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장로 여러 사람이 에스겔에게 물으러 온 것으로 시작되는 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여러 시기로 나누어서 그들에게 반복되어 행해지는 조상들의 죄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5-8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있을 때인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하나님이 준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시면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애굽의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으로 떠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노를 쏟고 진노를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10-16절에서는 애굽 땅에서 나와 광야에 이르게 된 이스라엘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수 있는 율례와 규례를 주시고, 안식일을 주시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음을 알게 하는 표징으로 삼습니다(11,12절).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않고 규례를 멸시하였으며 안식일을 크게 더럽힙니다(13절). 결국 이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아름다운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습니다.

 

 

18-26절은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의 자손들, 즉 2세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조상들의 율례를 따르지 말고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지 않고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으며 안식일을 더럽힙니다. 그래서 또 다시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노를 쏟고 진노를 이루실 것을 말씀합니다(21절).

 

 

이처럼 이스라엘의 죄가 반복되면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에 대한 말씀도 반복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계속 인도하시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아름다운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 땅을 주시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는 의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였으며, 이방 나라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9,14,22).

 

 

그리고 오늘 본문 44절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30절부터는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 역시 앞에서 등장한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히고 모든 가증한 것을 따라 행음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화제로 삼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자신을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힌 것입니다(31절).

 

 

 하나님이 과연 이러한 이스라엘이 묻는다고 해서 그것을 용납하시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반드시 다스릴 것임을 말씀합니다. 34-36절의 내용에서도 하나님이 광야에서 조상들을 심판한 것처럼 심판하실 것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현재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모든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또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시는 것입니다(44절). 이처럼 이스라엘의 죄와 상관없이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심으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토록 조상 대대로 가증한 죄를 행하고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혔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심판해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국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괜찮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자는 구원 받고 지옥 갈 자는 지옥가게 되어 있으니 굳이 힘써 믿으려고 할 필요 없이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반복되는 죄와 심판의 선언 속에서 역시 끊임없이 반복되는 ‘내 이름을 위하여’일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 취지를 멸시하는 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보다 자신이 중심이 된 자기의 삶에 몰두하고 있는 헛되고 악한 생각일 뿐입니다.

 

 

37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한다는 것은 목자가 자기 양을 우리에 집어넣으면서 그 수를 세고 살피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모든 양이 아니라 자기의 양을 살펴 우리에 들어가게 하고 그들을 언약의 줄로 매어 그들만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줄로 맨 자라 해서 고통에서 면제하여 다른 곳에 모아 편히 쉬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을 심판 아래 있게 하셨고 심판 아래 있게 하신 이스라엘 속에서 언약의 줄로 맨 자기 백성을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가증한 죄를 행하고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힌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43절의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는 말씀처럼 자신들의 가증한 죄와 스스로를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 됨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있음으로 해서 신자가 받는 유익인 것입니다.

 

 

신자는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미워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는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벌주지 않겠지’라는 의도로 회개하는 것은 회개를 가장한 위선이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자기를 위해 하는 회개일 뿐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하는 회개의 목적은 자기 구원에 있습니다. ‘회개하면 죄가 용서되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회개를 이용하여 구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 신자는 구원에 초점을 두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 심판해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이런 신자에게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요? 진심으로 복되고 기쁨이 되는 선언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40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성전을 세워 중단된 제사를 계속 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드리는 예물과 첫 열매와 성물을 받으시겠다는 뜻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지 않고 제물을 바치지 않아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신 것입니까?

 

 

제사와 제물에 대해 이스라엘은 철저했습니다. 제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의 길이고 수단이고 방법이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의 제사와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또다시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나를 섬길 것이라 하고 하나님이 섬기는 그들을 기쁘게 받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물과 첫 열매와 성물로 언급되는 것들이 율법에 명시된 제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그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물, 첫 열매, 성물은 참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예물이 될 수 없고, 첫 열매도 아니며 성물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를 실행할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예물이 되고 첫 열매가 되고 성물이 될 존재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예수님이 참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이고 첫 열매이며 성물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줄에 매인 신자는 자신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언약에 의해 오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만을 받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 자신의 그 어떤 행함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길과 스스로를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미워하게 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로 죄를 덮으시고 구원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열심 또한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열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길만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그 무엇에도 포기할 수 없는 그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 에스겔 (47강) 신앙과 점 신윤식 2015.09.26 3809
47 에스겔 (46강) 성소를 향한 칼 신윤식 2015.09.19 3927
46 에스겔 (45강) 비유로 말하는 자 신윤식 2015.09.12 3702
» 에스겔 (44강) 하나님의 열심 신윤식 2015.09.05 3928
44 에스겔 (43강) 더럽혀진 안식일 신윤식 2015.08.29 3709
43 에스겔 (42강) 내 이름을 위하여 신윤식 2015.08.22 3692
42 에스겔 (41강) 애가 신윤식 2015.08.15 3703
41 에스겔 (40강) 주의 길의 공평 신윤식 2015.08.08 3528
40 에스겔 (39강) 잘못된 속담 신윤식 2015.08.01 4175
39 에스겔 (38강) 높은 나무를 낮추고 신윤식 2015.07.25 3567
38 에스겔 (37강) 하나님의 수수께끼 신윤식 2015.07.18 3611
37 에스겔 (36강) 영원한 언약 신윤식 2015.07.11 3661
36 에스겔 (35강) 벗은 몸 신윤식 2015.07.04 3615
35 에스겔 (34강) 음녀의 행위 신윤식 2015.06.27 3687
34 에스겔 (33강) 존재의 근본 신윤식 2015.06.20 3825
33 에스겔 (32강) 무가치한 포도나무 신윤식 2015.06.13 3734
32 에스겔 (31강) 재앙과 위로 신윤식 2015.06.06 3896
31 에스겔 (30강) 내 백성으로 삼고 신윤식 2015.05.30 3689
30 에스겔 (29강) 영혼을 사냥하는 자 신윤식 2015.05.23 3883
29 에스겔 (28강) 평강의 묵시 신윤식 2015.05.16 4048
Board Pagination Prev 1 ...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