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10.24 20:45

(49강) 피 흘린 성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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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2:1-12http://onlycross.net/videos/eze/eze-2201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

3.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4.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5.너 이름이 더럽고 어지러움이 많은 자여 가까운 자나 먼 자나 다 너를 조롱하리라

6.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

7.그들이 네 가운데에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에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에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8.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9.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10.네 가운데에 자기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과 관계하는 자도 있었으며

11.어떤 사람은 그 이웃의 아내와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그의 며느리를 더럽혀 음행하였으며 네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그 자매 곧 아버지의 딸과 관계하였으며

12.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네가 변돈과 이자를 받았으며 이익을 탐하여 이웃을 속여 빼앗았으며 나를 잊어버렸도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심령이 가난한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심령의 가난은 상한 심령이 되어 자신이 붙들고 버티는 힘으로 여기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아니면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만이 이것을 복으로 받아들이며 그 복을 누리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있다는 것이 곧 은혜의 충만입니다.

 

 

요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러 온 한 여인을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과의 대화 끝에 예수님이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인에게는 남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남자도 그 여인의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즉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이 남자, 저 남자를 상대하는 창녀와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는 수치라고 할 수 있는 그 사실을 드러내심으로 그 여인을 창녀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세우십니다.

 

 

한 여인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를 거론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인을 도구 삼아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떤 사람으로 세상에 세우고자 하시는가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는 말씀을 하셨을 때 여인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반응합니다. 관심을 좀 더 편한 자기 생활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관심을 자신에게 말씀한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라는 것에 두게 하기 위해서 한 남자만을 사랑하지 못하는, 창녀와 다를 바 없는 여인의 본질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를 창녀의 자리에 세우시고, 밑바닥까지 모든 수치를 드러내시고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상태로 밀어 넣으셔서 하나님만 절대로 의존하는 심령이 가난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사랑입니다.

 

 

겔 16장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벌거벗은 피투성이의 갓난아이로 들에 버려진 것과 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고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행한 창녀로 행동하였습니다.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것은 심판입니다. 매일매일 심판을 받고 버림을 받아야 할 명목상의 신부일 뿐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사랑한 자라 부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사랑에 눈 뜬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에스겔서에서 끊임없이 선포되고 있는 심판은 지금까지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죄에 대한 처벌성 심판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 배경으로 깔려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바른 이해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심판하려거든 먼저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가증한 일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한 가증한 일을 알고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당연함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곧 죄 자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자신이 죄 자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강단에서 심판에 대한 내용이 사라졌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설사 심판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도 교인을 협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십일조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교회 일에 게으른 것을 죄로 규정하며 그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함으로 교인들에게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복음이 아니며 목사로서의 양심조차도 교회라는 욕망에 붙들려 있음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는 심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판이 언급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가 바르게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인들이 듣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심판에 대해서는 덮어 버린 채 사랑만 얘기하는 것은 다른 복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심판을 얘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할 수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심판을 얘기하지 않고는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심판이 언급되지 않은 사랑은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하고 만족시키기 위한 거짓이고 위선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는 이미 모든 죄가 용서되고 생명에 속한 구원 받은 자로서 이미 심판에서 건짐 받았는데 왜 계속 심판에 대해 들어야 하는가?’라고 반발하기도 합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가 용서 되었고 심판에서 건짐 받았다면 더 이상 죄와 심판에 대해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구원 받은 자로서 여전히 죄와 심판에 매어 있다면 예수님의 피 흘림과 구원을 멸시하는 것이고 구원의 영광과 기쁨과 구원 받은 자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역동적인 삶을 놓치는 것이다’라는 반발적 질문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여러분의 귀에도 참으로 그럴듯하게 들릴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구약에 대한 이해입니다. 특히 에스겔서와 함께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에 가득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를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 있는 신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구원 받았으니 심판과 상관이 없다면 심판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삭제해야 하는 것입니까?

 

 

심판은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이나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심판은 우리를 참된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을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는 것은 심판이 삭제된 사랑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육신과 연결하여 세상에서 부요와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을 곧 ‘사랑 받음’으로 이해하는 모든 것이 심판을 간과한 채 사랑을 말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범하는 중대한 오류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라보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는 거룩한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었고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제사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예루살렘은 피 흘리는 성이었을 뿐이며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혀 이방 나라와 다를 바 없는 가증한 곳이었을 뿐입니다.

 

 

6-12절을 보면 그들이 행한 가증한 일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가증한 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와는 상관이 없다’ 생각되십니까? 물론 행위만을 따진다면 거의 모든 내용이 여러분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은 행위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6절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7절은 ‘그들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보면 6-12절에 언급되는 가증한 일들은 모두 고관들의 악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은 고관들에게만 행해져야 마땅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어쨌든 고관들이 행한 악행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백성들까지 고관들과 함께 심판하고 이방인의 조롱과 함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6-12절에서 반복되고 있는‘네 가운데’라는 말에서 그 답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고관들의 가증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행해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관들의 가증한 일을 보면서 무엇을 알아야 했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가증한 일을 행하는 고관들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고관들의 가증한 일이 곧 자신들의 가증함이며 따라서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대상일 뿐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나를 잊어버렸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에 가증한 일을 마음껏 행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관들과 같은 가증한 일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가운데 가증한 일이 행해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 역시 가증한 존재임을 알았어야 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보면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는 가증한 일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이며 신자입니다. 그런데 가증한 일이 행해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진심으로 세상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곳으로 바라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또한 세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가증한 일이 행해지는 세상임에도 그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욕망에 붙들려 집착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일 때문에 울고 웃으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세상에서 부요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잊은 채 세상의 가증한 일에 동참하여 같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원을 받았으니 죄와 심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에 봉사하며 살자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위장한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감춤으로 걸림돌을 제거한 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피 흘린 성읍입니다. 피 흘린 성읍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즉 흘린 피의 값은 저주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흘린 피와 상관없다 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피 흘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피 흘림과 함께 그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심판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저주 받을 자가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마음 깊이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니면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가에 눈이 열리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믿음 생활 잘하면 신자답다는 인정을 받고 복을 받게 된다는 유혹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 받은 것은 분명 진리이고 사실입니다. 심판에서 건짐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영원한 복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실상은 본문에 등장하는 피 흘리는 성읍, 예루살렘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죽은 자입니다. ‘나는 죽은 자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알게 되면 세상일을 위해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생명과 무관한 죽은 자의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은 자이고 심판의 대상임을 아는 그가 참으로 산 자입니다. 그래서 산 자에게서는 항상 ‘나는 죽은 자’라는 고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들과 여러분이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 흘리는 모든 가증한 일은 여러분들 가운데서 행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을 떠나야 할 곳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야 말로 세상을 저주 아래 있는 곳으로 바라보지 않음의 증거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바르게 인식함으로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와 귀함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뜨게 될수록 죽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존심을 앞세우고 죽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며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곧 신자이며 산 자로 인정되는 것이며 이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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