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7.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8.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 찌꺼기가 되었나니 곧 풀무 불 가운데에 있는 놋이나 주석이나 쇠나 납이며 은의 찌꺼기로다
19.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다 찌꺼기가 되었은즉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으고
20.사람이 은이나 놋이나 쇠나 납이나 주석이나 모아서 풀무 불 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노여움과 분으로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21.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분노의 불을 너희에게 불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되
22.은이 풀무 불 가운데에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사랑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심하게 왜곡되어 뒤틀려 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가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기 이해를 성경적 시각으로 다시 접근하고 생각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은 성경 안에서 찾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상식과 생각이 이해의 요소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상식과 생각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다면 성경의 세계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 연구하고 찾아내어 가르치고 배우고 이해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우상일 뿐입니다. 결국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표출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믿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한순간도 우리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혀 반발하지 않고 불만도 갖지 않으며 사랑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해도 항상 사랑에 대해 불만이 있게 되고 반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구원하신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반발과 불만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는 욕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이 원한 바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베풀어지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불만과 반발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아니라 심판이 당연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심판이 당연한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이 당연한 존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당연한 존재인데도 그 사실에 대해 어두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세상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랑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욕망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꿈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욕망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드러나고 하나님의 사랑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8절에 보면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 찌꺼기가 되었나니 곧 풀무 불 가운데에 있는 놋이나 주석이나 쇠나 납이며 은의 찌꺼기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은의 찌꺼기라고 하십니다. 이것부터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서 어긋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찌꺼기가 아니라 은으로 여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처럼 귀히 여기셔서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지켜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세워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존재성은 ‘은의 찌꺼기’입니다.
18절을 다시 보시면 이스라엘을 은의 찌꺼기로 말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놋이나 주석이나 쇠나 납이라고도 하십니다. 놋, 주석, 쇠, 납은 모두 용도에 따라 나름대로 사용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비록 은의 찌꺼기 같은 존재이지만 놋이나 주석이나 쇠나 납과 같은 존재이기도 해서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뜻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놋, 주석, 쇠, 납이 풀무 불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것들을 녹여서 은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오직 은만을 얻고자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들 역시 은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은과 같은 귀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은 처음에는 순수한 은이 아니라 불순물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풀무 불에 녹여서 찌꺼기, 즉 불순물을 제거하시며 순수한 은으로 만들어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신자가 겪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모두 우리를 제련하시어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여기며 그러한 작업을 거친 후에 순수한 은이 되면 그때부터 복을 내려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순물을 죄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분리하여 순수한 은과 같은 상태가 되게 하신다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고난을 겪는 것도 모두 죄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성화되게 하셔서 순전한 은과 같은 상태의 신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아멘 할 것이고 그것이 곧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이 듣는 순간에는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견디는 힘이 되는 내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나를 단련하셔서 순전한 은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복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라는 시각으로 현재를 바라본다면 분명 마음에 위로가 될 것이고 그것이 말씀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인간이 중심이 된 이해일 뿐입니다. 찌꺼기가 아니라 은과 같은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되기를 원하는 탐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제멋대로 각본 된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탐심을 흡족하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진리처럼 들리는 것이고 은혜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찌꺼기가 제거되어 불순물이 없는 순전한 은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불순물이 없는 깨끗한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 일하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그 어떤 인간도 찌꺼기가 제거되어 순전한 은과 같은 상태로 완성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이해의 방향부터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나는 은입니다’가 아니라 ‘나는 은의 찌꺼기일 뿐입니다’라는 시각입니다. 이것이 신자 된 우리에게 있어야 할 자기 시각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아무 쓸모없고 버려지는 것이 당연한 찌꺼기로 바라보게 될 때 알게 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버려져야 할 쓸모없고 가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야 말로 참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눈을 뜨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잘못됨은 자신들을 은으로 여겼다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보다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 자기 존재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잘못입니다. 또한 이것이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의 잘못이었고 오늘날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우리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모든 관심이 자신을 세우는데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 교회의 성경 해석을 보면 하나 같이 인간을 세우는 방향으로만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 하신다’‘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실 것을 원하신다’이러한 말들 하나하나가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전제하고 나오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존재일 뿐임을 전제한다면 앞서 말한 모든 말들은 한낱 허풍일 뿐이며 인간의 자작극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반발할 것이 뻔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제가 누누이 언급한 것처럼 말씀은 우리를 인정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부수고 허문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이미 스스로 자신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자기를 향한 탐심입니다. 이러한 탐심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을 인간을 세우기 위한 용도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우리가 내 자신에 대해 세운 모든 것을 부수고 허물어 버립니다. 따라서 말씀의 은혜는 내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찌꺼기인 나를 붙들고 계셨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심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긍휼을 구하는 자로 하나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이러한 백성 되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루살렘을 피 흘린 성읍으로 말씀하시며 그 성에서 행해진 고관들의 더러운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더러운 일이 행해지는 곳에 존재하면서도 세상을 떠나야 할 것으로 보지 못하고 평안을 구하는 백성들 또한 고관들과 동일한 존재이며 그것이 곧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20-22절을 보면 “사람이 은이나 놋이나 쇠나 납이나 주석이나 모아서 풀무 불 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노여움과 분으로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분노의 불을 너희에게 불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되 은이 풀무 불 가운데에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풀무 불에 넣고 분노의 불로 녹임으로 그들에게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은 여호와가 분노를 쏟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곧 여호와의 분노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이스라엘이 찌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분노의 불로 인해 녹여져야 할 찌꺼기란 사실을 알지 못한 것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누구도 찌꺼기가 아닌 존재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찌꺼기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가치 있는 존재로 대접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찌꺼기가 아니라 은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탐심에 의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은이라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셨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리스도로 인해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누구도 그러한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고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빌 3:7-9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은 단지 세상의 조건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까지 포함한 고백입니다. 즉 자신까지도 배설물 같은 존재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상한 것으로 증거 되기를 원한 것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는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까지 배설물의 수준으로 무너짐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상한 가치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고후 4:7절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질그릇에 보배가 있다고 해서 질그릇이 보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질그릇이 보배를 가짐으로 해서 보배를 증거 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 됨의 가치입니다.
이스라엘의 역할은 자신들이 찌꺼기라는 존재성을 알게 됨으로 해서 그들에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런 그들을 심판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이 누구인가에 눈을 뜨도록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에게 있는 진짜 찌꺼기는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세우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찌꺼기임을 아는 것이 곧 찌꺼기가 제거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사 1:25)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있는 찌꺼기를 제하고자 하신 것은,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찌꺼기에 지나지 않은 존재임을 알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자신이 찌꺼기임을 아는 자리로 밀어 넣으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에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용서로 말미암아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만 받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