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11.07 16:26

(51강) 그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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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2:23-31http://onlycross.net/videos/eze/eze-22233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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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4.인자야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정결함을 얻지 못한 땅이요 진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한 땅이로다 하라

25.그 가운데에서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를 그 가운데에 많게 하였으며

26.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27.그 가운데에 그 고관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28.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였으며

29.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30.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죄의 자리로 끌어가는 것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죄의 자리로 끌려가서 우리의 모든 껍데기가 벗겨지고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며 그 죄로 인해 자신의 실체에 대한 정직한 자각이 있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죄와 상관없이도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는 항상 차별적이고 유동적이며 비보편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가 아닌 소유를 배경으로 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아닌 소유가 은혜의 배경으로 자리하기에 소유의 질적 양적의 차이에 따라 은혜는 차별될 것이고, 소유의 변동에 따라 은혜 또한 변동되고, 모든 신자의 소유가 동일하지 않으니 은혜 또한 비보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없이는 인간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실상에 대해 다루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는 자신을 믿음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과 긍휼과 용서와는 거리가 먼 폭력적인 존재로 비춰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추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선지자들의 반역과 제사장들의 죄와 고관들의 악함과 백성들의 죄로 구분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절)고 말씀하는 것처럼 심판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구약의 하나님을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에는 구약의 하나님처럼 끈질기게 죄를 추궁하고 드러내고 심판하는 하나님은 밀어내고 대신 여러분을 인정해 주고 사랑하시며 복을 주는 하나님이 하나님이기를 원하는 탐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탐심을 탐심으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을 가장한 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처럼 죄와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이 부인되어서는 안됩니다. 요일 4: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이스라엘을 치시고 예루살렘을 무너뜨리며 백성들을 포로 되게 하시고 큰 고통 가운데 있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신 신약의 하나님 안에서 해석하고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해가 여러분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함께 본문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께 찌꺼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찌꺼기라면 그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행한 모든 것 또한 찌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문제는 자신들이 찌꺼기이며 찌꺼기인 자신들이 행한 것 또한 찌꺼기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는 행함으로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찌꺼기라는 말은 인간을 단지 가치 없는 존재로 짓밟고자 한다기보다는 하나님과 무관한 것을 마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처럼 붙들고자 하는 것을 끊어버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찌꺼기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임을 생각해 보면 찌꺼기는 듣기 거북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과 무관한 것을 잘라내고 진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바라보게 하시는 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은혜임을 아는 그가 말씀에 눈 뜬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의 가치’라는 탐심의 시각으로는 절대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죄를 선지자, 제사장, 고관, 백성으로 나누어 말씀합니다. 선지자들은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삼키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을 삼키고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그 가운데 과부가 많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악함에 대해 하나님을 반역한 것으로 말합니다(25절). 그리고 고관들을 위해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고 자기들의 말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속여 전한 것입니다(28절).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백성들까지 그러한 구별을 하지 않게 만들었고 눈을 가리어 안식일을 보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게 하였으며(26절), 고관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였다고 말합니다(27절).

 

 

선지자, 제사장, 고관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인도하고 가르칠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나 악을 행했으니 백성들의 신앙이 어떠할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2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으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는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죄로 국한 되지 않습니다. 우린 선지자가 아니니까 제사장이 아니니까 고관이 아니니까 그들의 죄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벧전 2:9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분명l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택하신 족속, 즉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만큼 존귀한 존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위해 세움 받았는가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고 제사장이고 선지자라면 어떠한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죄는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세상은 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살인과 사기를 동일한 죄로 보지 않습니다. 죄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행위가 다르기에 죄도 다르다고 보는 것이 세상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죄를 하나로 봅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일까요? 악에게 지배당하는 본성입니다. 즉 인간이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죄입니다. 그리고 그 습성은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고 높아진 존재 가치를 힘으로 여기며 약자들 위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되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고관들이나 백성들의 죄가 이러한 습성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습성을 렘 5:30-31절에서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제사장이라는 것을 자기 권력으로 삼아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백성들은 오히려 그것을 좋게 여깁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거짓 예언을 좋아하고 제사장이란 권력으로 다스림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백성들조차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리고 자기들에게 복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선지자와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은 백성들의 이러한 생각을 이용하여 그들의 생각에 맞는 하나님을 말하고 백성들은 당연히 그것을 좋게 여긴 것입니다. 결국 제사장도 선지자도 백성들도 나의 유익이라는 습성에 하나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지만 우리 역시 나의 유익, 나의 소유에 집착하는 습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즉 본문이 거듭 확인해 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한 선지자고 율법을 범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여호와께서 말씀하지 아니한 것도 자기 생각에 맞으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그들이 우리입니다.

 

 

그러면 본문은 단지 이스라엘의 죄와 우리의 죄가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을 갖게 하는 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와 나의 죄가 같음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 본문의 전부라면 우리의 생각은 결국 죄를 고치려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30,31절을 보면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죄를 언급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결정적 문제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진노의 불로 명하여 이스라엘의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의인의 존재에 있었습니다. 의인도 몇 사람, 또는 수십 명이 아니라 단 한 사람만 요구되었습니다. 단 한 사람만의 의로움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서 능히 건질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한 사람의 의인조차 찾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의인을 찾으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습니다. 결국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그들의 죄 때문일까요 의인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표면적으로는 죄 때문이지만 어쨌든 의인을 찾으면 죄로 인한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결정적 이유는 의인이 없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 역시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렘 5:1절을 보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정의를 행하여 진리를 구하는 그가 곧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소위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키고 철저히 하나님을 신앙하며 섬긴다고 자부했던 예루살렘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의인입니까? 아니죠? 아무도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나설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우리 스스로 잘 압니다. 이 말은 우리는 정의를 행하지도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사도 장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목사 장로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타인의 위에 서고자 하는 탐심만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말씀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나 자신에게로만 향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마치 나의 관심이 말씀으로 향해 있는 것처럼 간주합니다. 이것이 위선이고 착각이며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에 해당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여러분 자신이 말씀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환상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저의 주관적 판단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판단입니다. 즉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목사의 위치와 자리에서 그대로 전해 드리는 것이며, 저 역시 말씀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로 판단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고 해서 저의 관심이 말씀으로만 향해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의 관심은 여러분과 동일하게 저에게로 향해 있고 세상으로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변하지 않은 악한 습성입니다. 다만 이러한 저의 관심과 습성이 악한 죄임을 알게 하시고 목사로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에 순종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증거 되는 것뿐입니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우리를 도구 삼아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이며 그 일에 동조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의해 행위대로 보응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의인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멸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소속된 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안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저주와 심판으로 밀어 넣으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복임을 알게 하시고 그러한 복의 사람으로 세우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하고 찬송케 하심으로 영광 받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인다운 특별한 행함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죄와 함께 30절과 31절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행함을 요구하신다는 생각에 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세상에 보내신 아들입니다. 우리는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죄와 허물이 용서되는 세계에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진노의 대상에 지나지 않은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나의 세계가 부인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 하고자 하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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