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11.21 16:32

(53강) 오홀리바의 행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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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3:11-21http://onlycross.net/videos/eze/eze-23112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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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12.그가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느니라

13.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14.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색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15.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그의 용모는 다 준수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16.그가 보고 곧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17.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18.그가 이같이 그의 음행을 나타내며 그가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의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

19.그가 그의 음행을 더하여 젊었을 때 곧 애굽 땅에서 행음하던 때를 생각하고

20.그의 하체는 나귀 같고 그의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21.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도다

 

<설교>

하나님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내세워서 이스라엘이 행음한 여인과 같음을 드러내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토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음한 두 여인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없이 엄연한 사실이고 실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곧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사실은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신부로 세워진 모든 사람이 행음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부라는 신분에 앉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 은혜를 마음에 두며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신부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을 사랑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에 대해 말할 때는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존재라는 것을 간과한 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죽었다’는 것이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존재이며 그것이 결코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둔다면 인간에게는 믿음도 사랑도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죽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행함의 죽음입니다. 선한 행위가 가능하지 않은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모든 것은 선물일 뿐이지 인간의 행함의 보답의 차원으로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믿음도 사랑도 행함도 가능하지 않음을 전제할 때 비로소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고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 53:5,6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아질 수 없는 병적 상태였음을 뜻합니다. 죄로 인해 더러운 몸이 되었고 죽음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기 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지금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나음을 받았다는 것은 믿음과 행함이 가능한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피 흘려 죽으신 은혜로 인해서 죄와 죽음에 대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가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해 행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누리게 된 평화입니다. 즉 심적으로 누리는 평안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게 되는 평화인 것입니다.

 

 

신자가 이 평화를 누린다면 그 증거는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에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은혜를 알고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 아래 있지 못하고 자신의 믿음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다만 인간의 종교심에 의한 헛된 짓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으로 출발하지 않는 것이고 여전히 인간에게 믿음과 행함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것이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자처한 이스라엘이 실제로는 행음을 한 더러운 존재임을 노골화하는 것입니다. 행음을 한 여인에게서 남편을 향한 사랑, 섬김, 순종 그 무엇도 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현주소임을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등장시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의미한 오홀라는 앗수르와 행음하였고 하나님은 오홀라를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겨 심판을 행하십니다. 10절에서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앗수르를 동원하여 오홀라의 아들 딸, 즉 북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죽이게 함으로 BC722년에 멸망합니다.

 

 

그런데 그 아우 오홀리바가 되어진 모든 일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여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여 오홀라보다 더 부패해졌다고 말합니다(11절). 오홀라처럼 앗수르를 사모하던 오홀리바가 갈대아 바벨론 사람을 보자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보낸 것입니다.

 

 

17,18절에서는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그가 이같이 그의 음행을 나타내며 그가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의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홀리바의 음행을 싫어하였습니다. 오홀라가 앗수르 한 나라를 사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앗수르 손에 넘기신 하나님이 오홀리바의 행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 지는 오홀라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홀리바는 오홀라가 당한 일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상을 향해서만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오홀리바는 또 다시 음행을 더하여 애굽 땅에서 행음하던 때를 생각하게 됩니다(19절).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가 사모하던 모든 나라를 동원하여 치게 하시는 것입니다(22,23절). 이것이 남쪽 유다의 행음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여”라는 내용입니다. 오홀리바가 오홀라의 멸망을 보고도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했고 오히려 오홀라보다 더 큰 악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았으되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겼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음성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구약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기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말씀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선지자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 우리가 과연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악함과 우리 또한 행음하는 두 여인과 동일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기는 하는 것입니까? 오홀리바처럼 오홀라의 심판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현실을 보게 하고 죄에서 떠나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사모하고 연애하는 음행의 길로만 가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한 음행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맞습니다. 그것이 현대 기독교의 실상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야고보서에서는 세상과 벗된 것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간음하는 여자가 곧 우리의 실상인 것입니다. 제아무리 교회 생활에 충실하고 열심을 동원하여 많은 봉사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해오셨다 할지라도 실체는 ‘간음하는 여자’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고집입니다. 늘 ‘내가 왜?’라고 반응합니다. 자신은 하나님만 바라볼 뿐 간음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고 우상을 섬긴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간음이 그런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세상과 벗된 것을 하나님의 원수라 하고 그들을 가리켜 간음하는 여자들로 지칭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세상과 벗된 관계에 있지 않다고 할 자신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스스로를 죄 없다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렘 3:2절을 보면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다 나라가 예레미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었을 때 자신들이 행음한 자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을까요? 예레미야의 말은 유다 백성 전체를 향한 아주 심한 욕과도 같습니다. 설사 자신이 음란과 행악을 행했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을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것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감추고 싶은 더러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음란과 행악을 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있으니 그것을 말해줄 것을 원할 것입니다. 이 또한 현대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바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음란과 행악으로 더렵혀진 존재입니다. 그러한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섬김과 순종은 나올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더러움을 가릴만한 선하고 의로운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피로써 다가오십니다. 그

 

 

렇다면 오홀라를 심판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홀라보다 더 간음을 행한 오홀리바 이야기를 하시고 그 역시 심판을 받게 된 이야기를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시는 이유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오홀리바는 오홀라를 보면서도 정신 차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오홀리바의 전철을 따르지 말고 정신 차려서 행음의 악한 행위로부터 벗어나라는 취지일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취지라면 하나님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성경을 보면서 정신 차릴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면서 남 유다가 그것을 보고 정신을 차리고 이방 나라를 사모하고 의지하는 간음에서 떠날 것을 기대하시거나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간음이 더 심해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심판하시고 간음에 대해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피를 들고 오신 분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장자 재앙에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죽음을 면했고 출애굽하게 된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유월절 규례를 세우시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피로 시작한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은 항상 피의 은혜에 머무르는 것으로 드러남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피로 세워지고 피로써 존재하는 피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이방 나라는 피와 상관없는 나라입니다. 그러한 이방 나라를 사모했다는 것은 피의 은혜에 머무는 것보다 세상이 누리는 부요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음을 뜻합니다. 피의 은혜로 가득한 십자가의 세계는 시시하게 보이고 비록 피의 은혜와 상관없다 할지라도 부요를 누리는 세상이 더 멋있게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간음이라는 것을 오홀라 오홀리바를 세워서 드러내신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희망은 남편의 용서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음한 우리에게 용서와 긍휼과 자비와 은혜로 다가오셨습니다. 피를 들고 오셔서 피로써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가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직도 이 피의 은혜가 시시하게 보입니까?

 

 

오홀라와 오홀리바 이야기를 하시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더 이상 앗수르 ,바벨론, 애굽을 사모하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만 사모하는 백성 되는 것을 원하셨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잘못하신 것입니다. 땅에 존재했던 사탄부터 제거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랬다면 인간이 사탄에게 미혹되는 일이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모하며 살았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렘 3:7,8절에서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렘 3:12절을 보면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출발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앞서 말씀드린 ‘피’입니다. 이스라엘이 피로써 출발했고 피가 그들을 존재하게 했음을 생각한다면 피의 세계로 돌아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피의 세계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의 은혜가 있으니 그 긍휼과 용서를 바라보는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오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목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렘 3:15절에서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지식과 명철은 피를 알게 하고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목자들의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피로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생각한다면 예수님만이 참된 목자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의 은혜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지식이고 명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면 자신이 오홀라보다 더 심한 간음을 행한 더러운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될 것이고, 그러한 자신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에게 온 마음이 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세상은 더 이상 사모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의 은혜가 온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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