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12.05 19:10

(55강) 녹슨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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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4: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24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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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의 이름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느니라

3.너는 이 반역하는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가마 하나를 걸라

4.건 후에 물을 붓고 양 떼에서 한 마리를 골라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 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에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지어다

6.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피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하나하나 꺼낼지어다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과연 은혜의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서라도 여러분 자신은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곡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곡해되는 이유는 자기가 중심이 된 은혜를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된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또는 ‘자기의 복과 성공’을 은혜의 내용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선악관에 의해 만들어지는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는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집니다. 신의 존재를 시작하여 신이 기뻐하고 싫어하는 것, 신이 베풀어주는 복과 은혜 등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것이 신앙으로 구축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종교에 의한 신은 철저히 인간 편에 있으며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신으로 존재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발 종교에 대한 이 말부터 이해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될 수 없습니다. 아예 그럴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죄를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끝없이 인간의 종교심에 부합된 종교의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자신이 믿을 것을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종교 세계를 부정하시고 참된 믿음의 세계를 세상에 남기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참된 믿음의 세계를 알고 그 세계에 대해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에게 구축되어 있던 종교 세계가 부정되고 무너지는 경험이 필히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것이 혼란이고 의문이고 갈등이며 배신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분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말이 여러분의 현실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고, 또한 현실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이러한 저의 말이 여러분께 감동으로 다가가기는커녕 반발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물론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쉽게 감동이 된다면 뭔가 수상쩍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반발이 있다면 ‘그 이유가 뭘까?’를 두고 고민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반발이 반발로 끝나고 귀를 닫아 버린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이 믿고 있는 알고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종교적 고집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완악함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인간의 종교심에 의해 추구하는 은혜는 분명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믿음을 부정하고 무너뜨림으로써 전적 무능력한 상태로 끌어갑니다. 반대로 종교심에 의해 추구되는 은혜는 항상 인간의 믿음을 긍정하고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잘되고 번성하는 것을 은혜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증거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할 수 없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교가 아닌 복음의 시각에서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말합니다.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의 의미는 왕하 25:1절에서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라고 말한 것처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된 날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그 날짜를 기록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 반역한 족속에게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가마 하나를 걸고 가마에 물을 부은 후 양 한 마리를 골라 제일 좋은 부분의 고기를 가마에 넣고 뼈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을 골라 가마에 가득 채우고 가마 밑에 나무를 쌓고 물을 펄펄 끓여 뼈가 물렁물렁할 때까지 삶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가마가 녹슨 가마입니다. 녹슨 가마에 물을 붓고 고기를 삶는다면 고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아무리 좋은 부위의 고기와 뼈를 넣고 삶았다 하더라도 가마의 녹으로 인해 고기와 뼈는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녹슨 가마가 고기를 망쳐 버리는 것입니다. 6절에서 녹슨 가마를 ‘피를 흘린 성읍’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녹슨 가마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의 모습이 녹슨 가마와 같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녹슨 가마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겔 11:1-3절에 “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서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그 문에 사람이 스물다섯 명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니라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1절에 스물다섯 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야아사냐와 블라댜라는 이름이 언급되는데 이들은 고관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스물다섯 명의 사람은 고관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않다는 것은 집이 그만큼 단단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집 안에 들어 있는 고기로 빗대어 어떤 공격에도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이 예루살렘을 뜻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이스라엘이 왕과 함께 많은 귀족들과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생각한 것이고 특별한 은혜를 받을 만큼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여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종교관에서 나온 은혜는 자신에게 좋은 상황을 하나님의 은혜로 연결하여 해석하고 ‘남들보다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니 나는 특별하다’는 자기중심적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왕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무사히 남아 있는 고관들 역시 그 상황을 자기중심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겔 11:2절을 보면 하나님은 그들을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미는 자로 말씀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이러한 종교관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보다는 좋은 상황에서 은혜를 생각하기 마련이고 다른 사람보다 좋은 상황이 주어지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좀 더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좋은 상황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좋은 상황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는 것으로 인해서 좋지 않은 상황은 은혜와 상관이 없고, 죄에 대한 책망과 징계의 의미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말하나 은혜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종교관에 의한 은혜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은혜는 은혜를 받으면 신앙적인 면이나 삶이 좋아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령 은혜가 임하면 염려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다거나 심적으로 평강이 있고 행복을 누리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언급되는 은혜는 모두가 이러한 범주에 속해있고, 아마 여러분도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현재는 이러한 은혜가 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린 것처럼 현실은 여러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일 뿐 이미 임한 은혜를 알고 은혜로 인해 감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위주의 은혜는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면 자기가 중심이 된 자기를 위한 믿음, 은혜, 사랑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의 맹점이라 할 수 있고 참된 믿음의 길을 훼방하는 걸림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고관들은 예루살렘을 단단한 가마로, 자신들을 가마 안의 좋은 고기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하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가마는 녹슨 가마입니다. 그리고 녹슨 가마에 넣어 삶게 하신 좋은 고기와 뼈는 유다의 고관, 귀족들을 지칭합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계층들입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전이 있는 거룩한 성이었습니다. 거룩한 성안에 신앙이 특별한 자신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여기시고 대우하실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예루살렘은 피를 흘린 성읍이었고 녹슨 가마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녹슨 가마에 고기와 뼈를 넣고 뼈가 무르도록 삶는다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단단한 가마로 여겼던 예루살렘은 녹슨 가마였을 뿐이고, 좋은 고기로 여겼던 그들 또한 가마 속에 넣어져 뼈가 무르도록 하나님의 분노의 불에 의해 삶겨져야 할 저주의 존재들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을 9-11절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화 있을진저 피를 흘린 성읍이여 내가 또 나무 무더기를 크게 하리라 나무를 많이 쌓고 불을 피워 그 고기를 삶아 녹이고 국물을 졸이고 그 뼈를 태우고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되게 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삶이 국물을 졸이고 뼈를 태우고 빈 가마를 얹어 달궈서 더러운 것을 녹게 하고 녹이 소멸되기까지 태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녹은 벗겨지지 않고 불에서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12절). 이처럼 예루살렘을 망하게 하고 성전이 불에 타고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셔서 큰 고난을 겪게 하신다 해도 그들은 정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유다의 실체인데 정작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니 하나님이 지켜줄 것이고 구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자신에 대해 착각하는 예루살렘처럼 우리 역시 우리 자신에 대해 착각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제아무리 좋은 고기로 여긴다 해도 녹슨 가마 속의 고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불로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녹이라면 녹슨 가마 속의 고기는 뼈가 무르고 국물이 졸아들 정도로 불을 피운다 해도 정화될 수 없습니다. 녹에 의해 오염된 상태 그대로일 뿐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은 정화될 수 없는 존재이며 마땅히 저주 받을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부정하고 부인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심이 있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 좋은 신자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때때로 구제를 하게 되면 구제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이처럼 자기를 긍정한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바라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유익이 무엇일까요? 그저 마음 편하게 자신을 위해 예수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하게 한다는 말을 환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어떤 행함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해도 죄는 정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녹슨 가마 안의 고기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스스로를 좋은 고기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마에 불을 피우시고 삶으신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좋은 고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신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 자기만의 종교 세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우리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토록 우리를 부정하게 하고 부인하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곧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뜰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은혜로만 나타나는 것이고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기 존재에 눈을 떴을 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정이 곧 은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정화할 수 없고 정화될 가능성도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정화되지 않은 상태의 여러분에게서 나와지는 것이 과연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질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분노를 여러분의 신앙 행위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죄도, 하나님의 분노도 삭제한 채 자신의 행위만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믿음 있는 자로 간주하는 것이 은혜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한 몸에 받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십자가를 알게 되면 죄로 인해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할 저주의 존재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구원 안에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여러분이 싫어한다고 해서 은혜가 은혜 되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자기 백성을 자기 부인이라는 은혜의 자리로 이끄실 것이고,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녹슨 가마 속의 고기이고 하나님의 분노의 불에 뼈가 무르도록 삶겨지고 태워지고 졸아들어 없어진다 해도 죄가 정화될 가능성이 없다면 우리에게 은혜는 심적 편안함이나 돈이 아니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일 뿐입니다. 때문에 복음으로 인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감사함이 있게 되는 것이 은혜인 것이고 신자는 이 은혜로 인해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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