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네 얼굴을 암몬 족속에게 돌리고 그들에게 예언하라
3.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4.그러므로 내가 너를 동방 사람에게 기업으로 넘겨 주리니 그들이 네 가운데에 진을 치며 네 가운데에 그 거처를 베풀며 네 열매를 먹으며 네 젖을 마실지라
5.내가 랍바를 낙타의 우리로 만들며 암몬 족속의 땅을 양 떼가 눕는 곳으로 삼은즉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6.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7.그런즉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 주어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서 끊어 버리며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패망하게 하여 멸하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설교>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시고 심판을 선포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방향을 이방나라로 향하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의 선입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정신 차리게 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는 반면 이방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에 구원의 기회가 없는 멸망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규정됩니다. 인간의 조건을 기준으로 선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에 의해 백성과 백성 아닌 자로 구별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생명에 속한 자로 백성 아닌 자는 사망에 속한 자로 나누어져 세상에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백성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을 거룩한 백성 되게 하심으로 그에게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용서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담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심판으로 갚으시겠다는 뜻과 계획이 하나님의 선택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구원의 의미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로 인해 자기중심적인 거짓 신앙으로 흘러가면서 백성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신의 뜻을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으로 여기시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참된 백성을 세상에 드러내심으로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며 거짓 신앙으로 흘러갔던 자칭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도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은 단지 그들이 멸망 받을 존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이방 나라의 심판을 통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의 선포는 25장부터 시작되어 32장까지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선포하신 이방 나라는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25:1-17), 두로(26:1-28:19), 시돈(28:20-23), 애굽(29:1-32:32)입니다. 이들 일곱 나라를 언급하는 것은 다른 이방나라에 비해 이들의 악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던 이들 이방 나라를 심판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이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와 전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이방 나라와 차별화했습니다. 비록 이방 나라가 가진 힘과 부요를 부러워했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은 심판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는 반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차별하며 심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심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여과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마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를 중요한 문제로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사람은 구원 받고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에서 단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선택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고 지옥가야 하느냐?’라며 반발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합리적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란이 야기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간과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인간 구원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관심 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이라는 구원 방식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가 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뜻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구원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선택이라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다스리시는 이유를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기 구원에 매이게 되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지 말라’ ‘기독교인으로 지옥 갈 수 있다’는 말에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현실은 분명 기독교인으로 지옥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기독교인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냐에 초점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이방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굳이 이방 나라를 향해서 심판을 선포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방 나라가 선지자로부터 심판에 대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하나님께 관심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니느웨처럼 이방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회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니느웨의 결단과 의지가 아니라 요나를 가르치기 위해 작정하신 하나님의 일의 결과였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방 나라를 향해 심판을 선포하신 이유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이방 나라의 심판을 선포하시면서 지적하시는 그들의 죄입니다.
첫째, 암몬의 죄는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3절)라고 조롱한 것과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한 것입니다(6절).
둘째, 모압의 죄는 8절에서 말한 것처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다나 믿지 않는 이방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것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라고 생각되십니까? 이처럼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죄 같지도 않은 것을 죄로 규정하시면서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셋째, 에돔의 죄는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심히 범죄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에돔의 조상은 야곱의 형 에서입니다. 따라서 유다와 에돔은 혈통으로 따지면 형제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에돔은 유다를 원수로 여긴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축복을 가로챘는데 결국 하나님에 의해 망하게 되자 그것을 조롱한 것을 원수 갚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넷째, 블레셋의 죄는 옛날부터 미워하여 멸시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갚아 진멸하고자 한 것입니다(15절). 이것은 블레셋이 유다를 항상 미워하고 멸시하여 원수로 대했으며 진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방 나라의 죄를 보면 그 중심에 유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를 조롱하고 미워하고 공격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미워하고 조롱했으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미움과 조롱을 받으면 안되는 족속들입니까? 오히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조롱하는 것을 죄로 규정하시며 심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심판하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급하신 그들의 죄가 유다와, 그리고 오늘 우리와 상관없는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암몬을 포함한 모든 이방 나라들은 유다의 배후에 존재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신적 지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즉 신을 잘 섬기면 복을 주고, 잘 섬기지 못하거나 죄를 범하면 벌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 나라가 바라보는 유다는 한마디로 말해 그들의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에 대해 자기들 마음대로 조롱하고 예전부터 갖고 있었던 감정 그대로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이해하는 측면에서는 유다나 이방 나라가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방 나라가 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유다가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가 이방 나라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고, 이방 나라가 그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면 이스라엘 또한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의 선포는 이방 나라를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는 유다를 이방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드러내시면서 심판을 못 박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다도 이방 나라도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에 대해서는 복으로 갚으시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현실은 이방 나라에 의해 무너지고 고통을 겪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유다보다 강하고 부요하게 평강을 누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유다를 조롱한 그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겪는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모압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유다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이러한 조롱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현실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에서는 기독교인이나 이방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다도 이방 나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윤리와 도덕적 삶의 문제도 아닙니다. 심판의 이유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유다도 하나님을 신으로는 섬겼지만 실재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수준은 이방인이 그들 신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도 자기들 생각대로 자신들을 위해서 행하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시고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 사회 내에서도 잘되고 못되는 것을 기준으로 복과 저주를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고 해서 고난과 고통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된 고유성이 고난과 고통에서 제외되고 세상의 복을 누리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고유성을 심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심어 놓으시고 누구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아래 있지 않는다면 그는 저주로 끝날 불쌍한 존재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유성을 심어 놓기 위해 이스라엘을 심판으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이방 나라는 유다가 넘어지고 고통 받는 것을 조롱하고 즐겨했습니다. 그것은 유다를 통해서 자신을 보는 눈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방 나라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유다를 통해서 자신의 악함을 깨닫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심판의 이유라면 유다는 어떻습니까? 유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과 다를 바 없는 모습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소 미움의 감정이 있었다면 그 감정 그대로 조롱하고 즐겨하는 것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의 모습 그대로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와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에 분노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방 나라의 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동안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은 채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고 위선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은 심판이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럼에도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과 자비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백성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의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릅니다. 백성 아닌 자의 하나님은 세상이 말하는 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성을 다해 신을 섬기면 복을 주고 문제도 해결해주며 기적을 베풀어 병도 고쳐주는 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하나님은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거룩한 백성 되게 하신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붙들어 놓기 위해 죄와 허물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신앙의 길에서 신자가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서 희미해지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용서의 은혜가 희미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죄와 허물을 드러내시고 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가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심을 아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