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12.26 18:24

(58강) 두로에 대한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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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6: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26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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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열한째 해 어느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3.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를 굽이치게 함 같이 여러 민족들이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4.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며

5.바다 가운데에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가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될 것이요

6.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설교>

자신에게서 죄를 보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이제는 ‘죄’라는 말이 너무 식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직 죄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죄라는 말이 식상하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죄를 보고 죄로 말미암아 자신을 알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를 아는 척,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있는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이 쉽게 자신의 죄를 알고 인정하며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그토록 집요하게 추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를 안다는 것은 누구나 죄로 인정하는 몇 가지의 잘못된 행동을 찾아내어 인정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죄는 그렇게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는 우리가 발견할 수 없도록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죄인지 아십니까? 스스로를 죄인으로 고백하시고 인정하신다면 그 죄가 무엇인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피의자가 범죄한 사실이 있을 때 진술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진술서는 자신이 행한 범죄 사실을 스스로 기재한 서면을 말합니다. 그처럼 여러분이 만약 죄에 대해 진술서를 작성하신다면 그 내용을 뭐라고 쓸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죄를 윤리와 도덕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어렸을 때 지우개 하나 훔친 것까지 기억해 내는 것으로 죄를 철저히 회개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윤리와 도덕적 죄에 종교적 시각에서의 죄를 첨가합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고 십일조를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것 등등이 그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죄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때문에 저는 신자가 죄에 대해 눈이 열리고 자신에게서 죄를 보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죄의 결국은 심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나 이방 나라나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심판에 차별이 있지 않습니다. 동일한 죄이기 때문에 동일한 심판으로 종결됩니다.

 

 

25장에서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 네 나라의 죄와 심판에 대한 말씀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면서도 정작 이방과 동일한 이스라엘의 죄를 보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과 다를 바 없는 패역한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이방과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이방과 동일하게 자기를 위해 살았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따른다고 생각한 것이 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26장부터 28장까지는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25:1-17절의 짧은 내용에서는 네 나라에 대한 심판이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 두로에 대한 심판 이야기는 아주 길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두로가 다른 이방 나라에 비해 아주 악하고 많은 죄를 행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놀랍게도 언급되는 두로의 죄는 2절의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는 이 한 구절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두로의 죄는 간단히 말하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좋아한 것입니다. 그것도 예루살렘과 원수 같은 관계에 있어서라기보다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자신들에게 경제적 이득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좋아한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 관계나 국가의 관계에서 얼마든지 그리고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로 인해 두로를 심판하겠다 하시고 그 심판에 대해 25장의 네 나라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세밀히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죄의 차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에 대한 기록이 짧고 길고의 여부를 죄의 가벼움과 중대함으로 나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죄일 뿐 가볍고 중대한 것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가볍고 중대한 것으로 차별된다면 우리는 서로의 죄를 비교하면서 누구의 죄가 더 큰지를 저울질하는 일에 몰두할 것이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자기 죄에 대해서는 관대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 하나 먹음으로써 세상이 죽음이라는 심판아래 있게 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을 부각시키면서 아담과 하와의 죄가 크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삽니까? 결국 죄를 추적하면 할수록 올무에 걸려서 꼼짝 못하게 되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추적하는데도 결국은 죄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로에 대한 심판 내용이 많다고 해서 두로의 죄를 특별하게 볼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 두로를 내세워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그만큼 많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두로에 대한 심판 이야기에 납득되려면 무엇보다 두로의 죄가 납득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25:3절에 보면 암몬 족속도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아하 좋다’라고 좋아한 것으로 인해 심판이 예언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로 또한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좋아한 것으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면 과연 심판의 대상인 암몬이나 두로가 그것을 납득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암몬이나 두로, 그리고 또 다른 이방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과 욕망으로 인해 우리를 세상에서 건져내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팽개치면서 그 자비와 사랑을 모독하는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활동만을 생각하며 마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처럼 인식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죄에서 벗어나 사는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두로의 죄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좋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2절)는 말이 그것입니다.

 

 

두로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는 도시입니다. 따라서 바다를 통한 무역으로 인해 경제적 부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두로의 약간 아래 내륙 쪽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위치적으로 보면 두로가 내륙과 무역을 하는데 있어서 예루살렘이 방해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면 두로가 내륙과 무역하는 일에 있어서 유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좋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두로는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이 두로 때문도 아닙니다. 두로는 단지 예루살렘 멸망으로 인해 자신들이 얻을 이익을 생각하며 좋아했을 뿐입니다. 누구나 두로와 같은 상황이라면 두로처럼 좋아했을 것입니다. 다른 이의 고통, 환난, 어려움보다는 내게 돌아올 이익에 마음 끌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로의 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을 좋아했다는 이유로 멸망했다면 두로의 죄에서 심각성을 발견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현실이 죄를 알지 못하고 죄에 대해서 말한다 해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듯 둔감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로의 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두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좋아 한 것은 단지 타인이 잘못되는 것을 좋아한 것이 죄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윤리와 도덕에 의해 규정되는 죄의 수준입니다. 겉으로는 타인이 잘못되는 것을 좋아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내막을 본다면 윤리와 도덕이 아닌 다른 중대한 문제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보면 두로는 예루살렘을 만민의 문으로 일컫습니다. 만민의 문이 깨진 것을 예루살렘에 깨진 것으로, 즉 멸망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방 나라인 두로가 예루살렘을 만민의 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예루살렘이 지니고 있는 특이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만민의 문이라는 것은 만민의 중심이라는 뜻인데, 두로가 경제적으로 자신들보다 약한 예루살렘을 만민의 문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두로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다윗 왕 때에 처음 등장합니다. 삼하 5:1-3절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이 있는 헤브론에 와서 다윗을 왕으로 섬기기로 작정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도 헤브론으로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부스 사람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쳐서 빼앗아 다윗 성으로 이름 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강성하여 가나안 지역 전체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을 삼하 5:10절에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삼하 5:11절에 보면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로 왕 히람이 자발적으로 다윗을 위한 집을 짓기 위해 사람과 백향목을 보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윗과의 화친을 원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영향력이 주변 모든 나라에게 미친 상태에서 다윗과 친분을 맺는 것이 두로의 평안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두로 왕 히람과 다윗의 관계는 솔로몬까지 이어집니다. 왕상 5:1절을 보면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왕상 5장에 보면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다윗이 전쟁으로 인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음을 말하면서 성전 건축을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히람은 솔로몬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오늘 여호와를 찬양할지로다 그가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도다”(왕상 5:7)라고 말하며 성전 건축을 돕게 되고 솔로몬과도 화친의 약조를 맺게 됩니다.

 

 

솔로몬이 이십년 만에 성전과 왕궁의 건축을 마치고 히람에게 성전 건축을 도운 보답으로 갈릴리 땅의 성읍 스무 곳을 줍니다. 그런데 히람이 두로에서 와서 솔로몬이 준 성읍들을 보고 눈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가불(기쁘지 않다)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람의 잘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로가 누구로 인해 존재했는가를 잊은 것입니다. 히람은 다윗과의 화친으로 인해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가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할 정도로 다윗으로 인해 살았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기뻐하며 여호와를 찬양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중 성읍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불이라고 이름 지은 것입니다.

 

 

히람이 진심으로 두로가 다윗으로 인해 평화롭게 존재했음을 잊지 않는다면 솔로몬에게 받은 성읍이 어떤 것이든 고마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히람은 성읍을 받고나자 자신이 성전 건축을 도와준 공로를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에 비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솔로몬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생각한다면 두로가 예루살렘을 만민의 문으로 말하는 것은, 다윗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좋아한 것은 그들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이 다윗 덕분이라는 것을 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로의 죄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주어진 것을 눈에 들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든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 아래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이것이 두로를 통해 볼 수 있는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서 두로를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바벨론 또한 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라질 먼지와 같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그 힘으로 살고자 하는 길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살고자 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결론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참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는 것이 죄입니다. 올 한해도 은혜로 살았다는 고백이 결론으로 남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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