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1.23 17:36

(62강) 부요로 드러난 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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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8:11-19http://onlycross.net/videos/eze/eze-28111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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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2.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4.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15.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16.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설교>

사람의 인생에는 각기 다양한 일들이 담겨 있습니다. 수명이나 직업, 환경에 따라 겪는 일들은 다르겠지만 그 일들로 인해 기뻐하고 슬퍼하며 때론 고통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을 책으로 쓴다면 수백 권이 된다거나 한 트럭이 될 거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생에 대해 사람들은 ‘잘 살았다’‘못살았다’는 말로 자기 인생을 요약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의 인생이 다 다르지만 한 가지 동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자기 인생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탐욕이며 탐욕은 곧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인생은 ‘죄’라는 한 글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롬 3:9절에서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죄 아래에 있게 된 것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시작된 저주이며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인생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항상 현재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며 좀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지만 누구도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어진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완벽한 환경과 조건이 주어졌다 해도 만족이 없기에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만해지는 죄 아래 있는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것을 두로의 이야기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2절에 보면 두로 왕에 대해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13,14절에서는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나라인 두로 왕을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던 존재로, 그것도 각종 보석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복된 모습으로 말씀하며 기름 부름을 받고 지키는 그룹으로 말씀하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누리게 된 것이 얼마나 영광된 것이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두로 왕에게 허락하신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완전한 도장,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답다는 말로, 그리고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된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로 왕이 지음을 받던 날에 그를 위해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다는 것도 하나님이 그에게 영광스러운 지위를 누리게 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은 그 말대로 하면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법궤를 지키는 천사를 뜻합니다. 두로 왕을 이러한 그룹으로 비유하신 것은 두로 왕이 하나님께 사명을 받아 법궤를 지키는 천사였다는 뜻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영광된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로 왕이 하나님으로 인해 누린 은총을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15절)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처럼 두로 왕의 존재 자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완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조건 아래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로 왕을 두고 슬픈 노래를 지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두로 왕이 누린 부요와 영광과 지위로 인해서 불의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과연 인간에게 부족함이 없다 할 정도로 완벽한 환경과 조건이 주어졌을 때 그 환경과 조건이 인간을 선함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두로 왕에게 허락하신 것은 완전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두로 왕은 하나님에 의해 누리게 된 것으로 마음이 강포로 가득해지고 교만해졌습니다.

 

 

이러한 두로 왕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인간에게 최상의 부와 영광을 누리는 완벽한 삶이 주어진다 해도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겸손한 삶의 길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로 왕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이며 우리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두로 왕이 이방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서 필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본성의 모습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라 할지라도 두로 왕과 같은 모습을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에 매몰 되어 살아가는 이유를 환경과 삶의 조건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주셔서 부요하게 해주시면 하나님께 충성하며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건강의 복을 주셔서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면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믿음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귀하게 여기며 만족으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 주신 그 자리에서 더 높아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특징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들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본성적 특징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로 왕을 위한 슬픈 노래를 부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슬픈 노래, 즉 깊은 탄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각기 다양한 인생을 살아온 인간에게서 동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있다면 후회와 탄식일 것입니다. 남들보다 성공하지 못하고 부요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죄 아래에서 지음 받은 인간의 모습이며 교만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결국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고 힘 있는 자로 군림하며 강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로 왕도 ‘나는 신이라’고 하며 현재의 부를 이룬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과시하는 교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느 것 하나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소유도 앎도 하나님으로 인해 누리게 된 것일 뿐입니다. 부를 누린다면 부요한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보여줘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고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 또한 복음을 나타내고 전할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알게 하신 결과입니다. 우리에게서 이것이 사라지게 되면 나타나는 것은 두로 왕과 같은 강포와 교만일 뿐임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두로 왕이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다고 말씀합니다. 무역을 함에 있어서 불의한 방법도 동원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어느 나라에서든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는 부정과 부패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만족이 없는 인간의 탐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로 왕은 한마디로 말해서 돈이 곧 힘이라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돈을 가진 자가 신의 자리에 앉아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이며 돈을 벌게 하는 것이 참된 지혜이고 돈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용사, 즉 네피림으로 존재하여 자기 이름을 높이는 것으로 인생의 만족과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벨탑이며 따라서 인간은 각자 자기 안에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원하십니까? 솔로몬의 부귀영화, 모든 길에 완전하다고 하신 두로 왕과 같은 인생입니까? 그러한 인생이면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인생을 누려본 솔로몬이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라고 말합니다.

 

 

솔로몬도 부귀영화로 인해 만족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 개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의 눈에는 만족함이 없다(잠 27:20)는 말처럼 그 어떤 사람도 보이는 것에 대해 만족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현실이며 그 마지막은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18절)라고 말씀한 두로 왕과 같을 뿐입니다.

 

 

인생의 답은 부요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곳간이 금과 은으로 가득해지는 것이 인생을 잘 살고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잘 살고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두로 왕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은 인생의 답이 부요에 있지 않음을 아시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요를 향한 집착, 탐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부요를 향한 집착과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을 위한 슬픈 노래, 애통과 탄식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부요를 향한 집착과 탐욕 아래 있는 자신을 위한 애통과 탄식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면 그것은 가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부요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확실함을 둔다면 부요를 좇고자 하는 자신으로 인한 애통과 탄식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보다 좀 더 나은 자리에 있기를 추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여러분 자신에게서 확인하십시오. 그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조차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고, 여러분의 이름을 세우고자 하는 바벨탑을 쌓는 것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교만입니다. 좋은 인격과 윤리적 행동, 교회에서의 모범적인 행동 등으로 죄는 희석시키고 대신 ‘믿음이 좋다’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고자 하는 것이 인간임을 아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은 자로 예수님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 강포하고 교만한 자며 하나님의 원수로 예수님께 나오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증거인 것입니다. 이 은혜로 인해 신자에게 맺어지는 열매가 기쁨이며 감사입니다.

 

 

고후 3:4-5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 무엇이든 그것을 자신의 지혜와 힘의 결과물로 생각하게 되면 만족이 없습니다. 내 힘으로 좀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갈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안다면 신자는 그것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고 믿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은 보이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요에 확실함을 둡니다. 부요하면 인생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끝에 도달하게 되면 그 확신도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깨달을 수 있는 확실함의 세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증거된 예수님의 피의 은혜와 부활이 그 증거입니다. 언제나 세상에 미련을 두고 두로 왕처럼 부요를 좇으며 불의를 통해서라도 부요하게 되기를 원하는 나 같은 존재가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존재하지만 드러내는 것은 불의일 뿐입니다. 자신의 현재에 감사하지 않고 좀 더 나아지고자 하는 바벨탑을 쌓는 불의의 끝은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불의의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이고 그 마지막이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심판이 확실함으로 다가온다면 신자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인해 죄가 용서되고 죄 없는 자로 선언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영광된 지위에 앉아있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에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신자가 은혜에 이끌려 생명의 세계로 향하게 되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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