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2.13 18:19

(65강) 미약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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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9:13-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29131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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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십 년 끝에 내가 만민 중에 흩은 애굽 사람을 다시 모아 내되

14.애굽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이켜 바드로스 땅 곧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 그들이 거기에서 미약한 나라가 되되

15.나라 가운데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나라들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리니 내가 그들을 감하여 다시는 나라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

16.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지가 되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돌이켜 그들을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그 죄악이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설교>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세상의 힘과 권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것에 비하면 영원하지도 않고 가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치 없는 것으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있으면 인생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다 생각하여 타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타협에 대한 경고가 곧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제아무리 즐거움과 기쁨으로 채워진 삶을 산다 해도 저주의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저주 아래 있고 없고의 문제보다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에 더 중요성을 두고 있습니다. 저주에서 건짐 받는 것보다 지금 당장 나에게 힘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이것을 성경은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어둠은 빛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빛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이러한 어둠입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상에서 신자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만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신자가 예수님만을 믿는 것은 내가 살고자 하는 인생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삶의 이야기만 남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현재의 삶에 아무 불만이 없이 전적으로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이 살고자 하는 인생을 살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인생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오게 되고 빛을 빛으로 알아보게 되면 여러분이 살고자 하는 인생보다는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인생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되면서 내가 살아온 인생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살게 하신 은혜에 대한 이야기만 남게 되는 것이 예수님만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신자로 어둠의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자랑하고 높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시고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가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 사랑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일하시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에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바라본다는 뜻이 됩니다.

 

런데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해 산다는 뜻이 되고 그것을 어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둠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온통 자기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자신을 과시하고 높이고 자랑할 이야기꺼리가 있게 하신 것 때문일 뿐입니다. 이처럼 자기 이야기로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에서 접할 수 있는 간증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붙들려 살아온 삶이었음을 알게 되면 자기 이야기는 사라지게 됩니다. 반면에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참된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나는 어둠이고 저주의 자식이며 죄인의 괴수입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자기 이야기는 이것뿐입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해왔던 일들이 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죄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면 그동안 자신의 이야기에 가려져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보이고,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내가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됨으로 자기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교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인 됨을 알게 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며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한다고 생각합니까?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방 나라처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이유가 그것이라면 이스라엘이나 지금의 우리는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이방 나라에 대한 내용들을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린 스스로를 하나님을 알고 있고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스라엘 민족이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방 나라의 심판에 자신들은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이 자명합니다.

 

 

하지만 이방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은 의지할 만한 대상이었습니다. 애굽이 자신들을 도와주면 바벨론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애굽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황폐하게 하시고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라고 큰소리치면서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과시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로 왕이 어떤 자로 여겨지겠습니까? 지금도 살아계셔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밀쳐내고 그 자리에 앉고자 하는 교만으로 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로 왕은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라고 자신을 과시하는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왕에게는 심판의 이유가 되는 것이고 바로 왕처럼 자기 이야기를 통해 만족과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우리 또한 심판의 길에 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 나라의 심판 이야기, 애굽의 심판 이야기에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자라는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 중에 하나는 세상을 어둠이라 하면서 정작 어둠에 마음을 두고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가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그리워한다면 그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심판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인정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현실은 세상이 가는 길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곧 바로 왕이라는 의미가 되고 이방 나라의 심판 이야기는 우리들 이야기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3,14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십 년 끝에 내가 만민 중에 흩은 애굽 사람을 다시 모아 내되 애굽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이켜 바드로스 땅 곧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 그들이 거기에서 미약한 나라가 되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을 황폐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기간을 사십 년으로 정하십니다. 그리고 사십 년 끝에 하나님이 만민 중에 흩으신 애굽 사람을 다시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번 황폐하게 하신 애굽을 왜 다시 모아 고국 땅에 돌아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애굽도 회복하시겠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은 애굽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국 땅으로 돌아가되 거기에서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하시고 다시는 나라들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고 나라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애굽을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는 애굽을 미약하게 하셔서 세상의 강함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만인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로 묘사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졌다 해도 결국에는 미약한 나라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는 세상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강함과 약함을 판단하고 저울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은 언제나 애굽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벗어났지만 광야에서 애굽의 것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애굽의 것만 있으면 만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애굽과 다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애굽에서 육신이 벗어났다 해도 마음은 여전히 애굽을 향해 있었으며 그것으로 애굽과 이스라엘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애굽을 사십 년 동안 황폐하게 하신 것도 사십 년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이 곧 애굽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애굽을 심판하시고 사십 년 동안 황폐하게 하신 것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하셔서 이스라엘 족속의 의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미약한 나라일까요 강한 나라일까요?

 

 

마 13:31,32절에 보면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천국은 외적 조건으로 따진다면 겨자씨 한 알로 비유될 정도로 아주 미약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애굽과 같은 세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실망하게 하고 조롱을 받을 뿐입니다. 우린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무시와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힘이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메시아라고 하면서도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도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심판하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조롱과 무시를 받으면서도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신 나라와 세상이 기대하는 나라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현실과 우리가 바라는 현실은 정말 다릅니다. 우리가 바라는 현실은 애굽처럼 사는 것입니다. 두로와 바벨론과 앗수르처럼 부요와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기쁨과 즐거움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현실을 꿈꾸며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담 안에 있는 인간에게서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속성입니다. 이러한 속성에 의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십자가로 확연히 증거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천국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미약한 모습으로 오셨기에 천국이 천국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무시와 조롱을 받지만 미약한 모습에 감춰져 있는 지극히 큰 능력의 나라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미약한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 있는 신자의 참된 현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애굽을 포함한 이방 나라의 부요와 힘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제든 하나님의 뜻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 배설물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미약한 나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장착한다 해도 미약한 나라일 뿐입니다.

 

 

반면에 정말 강력한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는 겨자씨 한 알처럼 미약하게 보이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실제는 영광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된 상태의 천국을 자신의 현실로 바라보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신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여전히 미약한 상태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약하다고 여기는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과 영광을 바라보고 그것이 곧 자신의 현실이 될 것을 믿는다면 애굽을 그리워하거나 애굽처럼 되는 것에 희망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을 소망하고 믿는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현재로 인해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 73:12-14절을 보면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형통으로 인해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시 73:5-6)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형통을 자기 지혜와 힘으로 이룬 것처럼 여기고 자신을 과시하게 됩니다. 두로 왕이나 애굽의 바로 왕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는 말씀처럼 교만의 결국은 패망일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면 두로나 애굽과 같은 존재의 끝은 패망임을 알게 될 것이고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야 말로 헛된 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난 이스라엘도 미약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은 미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강해진 것이 아니라 강하신 하나님께 붙들려 있기에 이스라엘을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붙들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세상의 강함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동일한 속성으로 살아가며 애굽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참된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게 되며 그 은혜와 사랑의 행하심이 나의 이야기가 되고 삶이 되는 것이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미약한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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