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2.20 17:23

(66강) 이스라엘의 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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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9:17-21http://onlycross.net/videos/eze/eze-29172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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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스물일곱째 해 첫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8.인자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군대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크게 수고하여 모든 머리털이 무지러졌고 모든 어깨가 벗어졌으나 그와 군대가 그 수고한 대가를 두로에서 얻지 못하였느니라

19.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애굽 땅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넘기리니 그가 그 무리를 잡아가며 물건을 노략하며 빼앗아 갈 것이라 이것이 그 군대의 보상이 되리라

20.그들의 수고는 나를 위하여 함인즉 그 대가로 내가 애굽 땅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그 날에 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고 나는 또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설교>

성경에서 인간은 연약한 존재로 등장합니다. 성경이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은 승리와 영광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며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이 되어 자신이 존재하게 됨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증거하고자 하는 것도 이스라엘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이 이스라엘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목적대로 이끌어 오셨음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인간의 활동을 아예 무시하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승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활동이며 할 일입니다. 즉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되어짐을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이라면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불의한 존재란 것입니다. 호 14:1절에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현실은 불의한 자입니다. 불의한 자인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자기 백성의 영혼을 채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유도 조건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고 죄 가운데 있게 된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신 적도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과 이유를 만들어 놓고 있을 뿐입니다. 가령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식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어떤 틀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받으셨다면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야 할 이유가 있으며 또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사랑을 받을 이유와 조건이 여러분께 있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조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격과 덕목을 갖추고 인생이 선행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을 받을 자격도 조건도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간됨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없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버리신다 해도 항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란 존재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화하여 자신이 원한 것을 받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면 원하는 것을 주십시오’라는 자기 요구를 들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을 알지 못하고 아는 것처럼 하는 것이고 아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적도 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랑은 신자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즉 사랑하는 자 되는 것이 사랑을 받은 흔적인 것인지 자신이 타인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누리는 것이 사랑을 받은 흔적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랑에 눈을 뜬다면 현재의 자기 모습으로 인해 행여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불안해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모든 자가 사랑 아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애굽 땅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넘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또한 애굽의 무리를 잡아가며 물건을 노략하여 빼앗아 갈 것이라고 하시며 이것이 그 군대의 보상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그들의 수고는 나를 위하여 함인즉 그 대가로 내가 애굽 땅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합니다.

 

 

이 내용들을 보면 하나님이 마치 애굽은 미워하시고 바벨론은 사랑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방 나라인 바벨론이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하나님은 그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애굽 땅을 주신다는 것을 쉽게 납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애굽 땅을 바벨론에게 수고의 대가로 주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애굽 땅을 가지고 그로 인해 더욱 그 세력이 확장되는 나라가 되었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도구로 존재하고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고의 대가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절대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마치 그것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절대적인 것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몰락의 길로 향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고 답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두로와 애굽의 몰락, 그리고 뒤에 등장하는 바벨론의 몰락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라는 사실이 신자의 믿음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면 비록 지금은 부와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이 복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4,25)는 말씀에 더 마음이 향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히 감사와 기쁨은 없을 것이고 늘 좀 더 나아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지는 것이 없다 생각되면 불만만 남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현실이 돈으로 연결되어 있고, 지금 부요하고 지금 배부르며 지금 웃는 자로 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기에 예수님의 말씀도 그 마음에 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이 주는 위로를 생각하고 그 위로를 받고자 하기에 말씀이 주는 참된 위로를 외면하게 됩니다. 결국 그 마음은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채워지지 않은 채 평생 돈만 생각하다가 절대적인 가치 있는 것들을 잃어버린 인생으로 종결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참된 불행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21절에 보면 “그 날에 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고 나는 또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이 애굽을 치고 애굽 땅을 수고의 대가로 받으며 바벨론의 부와 힘이 영원할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왕성해져갈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뿔로 인해서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예비 된 한 뿔이 무엇일까요? 말씀드리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뿔은 곧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답을 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뿔은 권세와 힘의 상징이며 메시아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애굽의 몰락과 함께 이스라엘의 한 뿔을 언급하는 것은 몰락의 길로 가는 세상 세력에 빗대어 영원한 구원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가 가장 확실하고 절대적이란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 132:17절을 보면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시 132:12절에서 다윗의 후손을 영원히 왕위에 앉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13절부터는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의 거처로 삼고자 하시며 그것을 영원히 쉴 곳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시온의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시고 성도들은 즐겁게 외치게 하겠다고 하시며 이 모든 구원이 다윗의 뿔을 통해 이루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이 영원히 쉴 거처를 위해 다윗의 뿔을 예비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뿔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됩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뿔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 영원히 쉬시는 거처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낯설고 생소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쉴 거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나 그 거처가 그리스도라는 말들이 그렇습니다. 사실 이 내용들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현실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뿔은 우리의 참된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요 14: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쉴 거처는 다윗의 뿔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이 하나님과 거처를 함께 하게 하시겠다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씀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마음에 와 닿습니까? 이러한 사랑에 마음이 절실해집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다면,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거처를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고아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누구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충분히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육신의 문제에만 염두를 둔 어리석음이며 착각일 뿐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힘에 붙들려 사망으로 끌려가고 있는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한 무지의 소치인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면 자신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돌봐주는 분이 계신다는 것에 안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고아와 같은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처가 되어주시고 항상 함께 하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스라엘의 뿔, 즉 다윗의 뿔로 오신 그리스도로 구현되었음을 믿기에 그리스도만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4:18,19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으로 되어진 것이고 예수님으로 인해 성취된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 되신 것이 사랑의 전부인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아는 그가 하나님이 오셔서 거처가 되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사랑에 두고자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게 하겠다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하시고 바벨론에 포로 되게 하시며, 그들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세상의 부와 권력과 영화의 헛됨을 두로와 애굽 등의 몰락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동일한 세상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른 것은 돈 있는 자와 없는 자,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의 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누려 보고 싶어서 땀을 흘리고 있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그 끝의 몰락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뿔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의와 생명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욕심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내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닌 희생의 사랑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을 사모하면서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사랑 안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뿔이 신자의 마음에 돋아남으로 해서 온전히 우리에게 구원의 뿔이 되신 그리스도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하는 것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두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구원의 뿔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거처에 함께 하게 되고 사랑이 심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을 믿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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