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2.27 17:16

(67강) 여호와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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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0:1-5http://onlycross.net/videos/eze/eze-30010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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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

3.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4.애굽에 칼이 임할 것이라 애굽에서 죽임 당한 자들이 엎드러질 때에 구스에 심한 근심이 있을 것이며 애굽의 무리가 잡혀 가며 그 터가 헐릴 것이요

5.구스와 붓과 룻과 모든 섞인 백성과 굽과 및 동맹한 땅의 백성들이 그들과 함께 칼에 엎드러지리라

 

 

<설교>

애굽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은 반드시 그대로 시행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에는 번복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심판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애굽이 어떻게 변하고 발전하든 상관없이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결정과 일하심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이 구원 받을만한 나라로 변화되었다 해도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심판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고 번복이 없다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처벌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심판을 미리 결정하고 그대로 시행하신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라 여기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구원 받을만한 존재로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인간도 얼마든지 구원 받을만한 존재로 변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잣대가 아닌 자기의 잣대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이든 자기의 잣대로 자신을 판단한다면 ‘나는 심판이 당연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는 나름대로 믿음으로 선하게 살아온 삶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잣대에 의하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고 행할 가능성도 없으며 구원받을 만한 인간으로 변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심판은 모든 인간에게 결정되어진 하나님의 뜻이며 의지인 것입니다.

 

 

3절에서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고 말씀합니다.

 

 

그 날은 애굽에 심판이 임하는 재앙의 날입니다. 그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날은 애굽만이 아니라 열국에 해당되는 날입니다. ‘여러 나라들의 때’라는 말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애굽의 심판은 세상의 종말적 심판을 암시하고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스스로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겔 29:3,9)라고 자신의 힘과 업적을 자랑하며 자기 이름을 높였습니다. 두로 왕은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겔 28:2)라며 자신을 신적 존재로 높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심판의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에서 구원 받는 사람은 바로 왕이나 두로 왕과는 다른 인간일까요? 어떤 점에서든 다른 면이 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심판은 모든 인간에게 결정된 것이고 그것은 모든 인간이 애굽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살펴 볼 중요한 내용입니다. 애굽과 두로 등 심판이 결정된 모든 나라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드러날 수밖에 없는 구원에 속한 자의 다른 점, 그것이 곧 신자 됨이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이 부르신 자기 백성에게 일하심으로 맺어진 열매인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통곡하며 이르기를 슬프다 이 날이여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그 때가 곧 재앙의 날입니다. 재앙의 날에 통곡하고 슬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통곡하지 말라 해도 통곡할 것이고 슬퍼하지 말라 해도 슬퍼할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에게 예언하라 하신 것은 심판의 날이 이르면 그 때 통곡하고 슬퍼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이 가까웠으니 통곡하고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참된 현실로 바라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병으로 인해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의사로부터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무시하고 자신과 상관없는 말로 치부한 채 살던 것처럼 살아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든 검사를 통해서 내려진 결과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신의 삶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통곡하고 슬퍼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애굽과 두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우연히 발생한 세계사의 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역사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의해 말씀대로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 안에 우리가 존재한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이야 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때로 다가올 것이고, 그 때가 곧 세상의 최후의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세상의 형편입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 안에서 먹고 마시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요? 예수 안은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불에 태워질 곳일 뿐입니다. 불에 태워질 세상 속에 우리도 있었는데 구원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 예수 안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되고 오래 사는 것이 복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암 5:18,19절에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심판의 대상이 예상 외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며 열심히 제사 드리고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셨는데 왜 그것이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이스라엘의 오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모스서는 북쪽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날을 사모한 이유는 여호와의 날을 자신들의 구원의 날, 즉 복된 날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귀한 제물을 바치며 열성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여호와 날’을 이스라엘과 같은 시각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자신을 여호와를 믿고 예배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열성적인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있다고 여기고 그러한 자신에게 복을 주고 구원하는 날이 곧 여호와의 날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착각이었고 오늘 우리의 착각이며 그러한 착각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하는 것이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실제로는 빛이 아니며 어둠이었던 것입니다.

 

 

애굽에게 여호와의 날은 통곡하며 슬퍼해야 할 재앙의 날입니다. 이 날은 여러 나라들에게 해당되는 날이며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가를 몰랐습니다. 그들의 실상은 애굽과 같았으며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었을 뿐이며 심판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몰랐기 때문에 심판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암 5:19절의 말처럼 어떤 사람이 사자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피하여 살았다고 한숨 돌릴 때 곰을 만난 것과 같고, 집이라는 자신의 안식과 평안의 공간에서 벽에 손을 대었다가 거기 있던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은 어둠의 날이며 어느 곳에 있어도 안전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의해 죽어야 하는 날인 것입니다.

 

 

본문 4,5절을 보면 “애굽에 칼이 임할 것이라 애굽에서 죽임 당한 자들이 엎드러질 때에 구스에 심한 근심이 있을 것이며 애굽의 무리가 잡혀 가며 그 터가 헐릴 것이요 구스와 붓과 룻과 모든 섞인 백성과 굽과 및 동맹한 땅의 백성들이 그들과 함께 칼에 엎드러지리라”고 말하는 이것이 여호와의 날에 있을 실상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를 사모했습니다. 내가 신이라고 하는 두로처럼 부강해지기를 원했고 강을 나를 위해 내가 만들었다며 자기 이름을 높이며 교만한 애굽처럼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을 사모했습니다. 이것을 23장에서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여인을 등장시켜 음란이 곧 이스라엘의 실상이었음을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의 의미는 요엘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욜 1:14,15절에 보면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고 말합니다.

 

 

요엘 선지자도 여호와의 날을 슬픈 날로 말합니다. 멸망이 이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요엘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했음을 생각하면 말씀드린 것처럼 남쪽 유다 역시 북쪽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 남쪽 이스라엘 모두의 잘못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선지자의 예언에서 확인하지 못하고 제물을 바치며 열심히 제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었음을 깊이 주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우리의 잘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여호와의 날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날일지언정 믿는 자에게는 복이 되는 날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매일매일 그 날, 여호와의 칼에 엎드러진 날에 가깝게 다가갈 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오직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소원과 상관없이 여호와의 뜻대로 여호와께서 작정하신 대로 일을 행하시는 날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러한 여호와의 날을 살고 있는 것이고, 이 날의 의미를 제대로 볼 줄 아는 그가 예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인 것입니다.

 

 

신자는 매일 여호와의 날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습에서 그리고 자신에게서 종말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사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로 인해 실망하고 불만과 원망을 안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슥 14:1,2에서도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스가랴 역시 여호와의 날을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심판의 말로 말합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은 하나 같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서 버려져야 할 생각은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야 말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보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구 하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입니다. 겔 30장에서도 언급되는 말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 말을 이방 민족을 행해서만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말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 역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드러냅니다. 누구든 여호와를 아는 그가 곧 구원에 속한 자이고,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 남은 자를 구별하여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안다면 자신의 믿음을 내세우면 믿음의 덕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시각에서 자신을 보면서 ‘믿음 없음’을 깊이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믿음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부서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날마다 여호와의 날을 살아가는 신자 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자신으로 인해 슬퍼하며 통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슥 14:7,8절에서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라는 것은 여호와만 아시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동해와 서해로 흐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에스겔 47장에서 말하는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그 날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날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시는 그 날은 시간적인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게 됨으로 인해 자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게 되는 그것이 여호와의 날을 사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는 애굽처럼 칼에 엎드러질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만족이 되고 기쁨이 되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신자에게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은 영원한 생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임을 알게 된 그들만이 여호와께서 아시는 그 날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그 날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명백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대까지 신자는 예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은혜를 무시하고 두로와 애굽처럼 자신을 주의 자리에 세우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현실만을 즐기고자 하는 세상 속에서 신자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복음의 능력은 언제나 그렇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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