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열한째 해 셋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누구에게 비하랴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5.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크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뻗어 나갔고
6.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7.그 뿌리가 큰 물 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설교>
신자는 세상 안에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만약 다른 곳은 보이지 않고 세상만 보인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관념화 되어 지식으로만 인식되어 있을 뿐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길을 가는 상태는 아닌 것입니다. 신자가 진리를 깨달았다면 고백되는 것은 십자가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자신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 받았음을 알기에 그 길로 가기를 힘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에서 벗어나 내 뜻을 위한 길에만 집착합니다. 진리를 알았다 하면서도 진리에 머물지 못하고 여전히 욕망에 붙들려 세상을 바라보며 화려한 모습으로 그 세상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헛된 세상이 아닌 참된 생명인 그리스도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것을 외치기 위해 선지자를 세우시고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부정했습니다. 타인보다 더 높은 자리를 원하고 자기의 것을 높이 쌓아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바벨탑의 세계가 진리의 세계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도우실리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무너져야 하고 부정되어야 할 뿐입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은 그것을 외치면서 진리가 증거 하는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은혜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은혜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와 사도가 증거한 은혜의 세계는 자기가 부정되어야 하는 세계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이 부정되어야 하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앗수르는 큰 나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3절)고 말씀한 것처럼 앗수르는 힘을 가진 큰 나무와 같은 나라입니다.
8,9절의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는 내용처럼 앗수르의 영화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의 모든 나무가 시기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을 앗수르에 비하여 말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을 앗수르에 비하여 말하는 것은 바로 왕이 단지 앗수르에 비할 만큼 큰 나무와 같은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기 보다는 애굽의 운명이 앗수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과 그 무리에게 앗수르에 대해 예언하라고 하셨을 때 앗수르는 이미 멸망한 후였습니다. 이미 멸망한 앗수르의 영화를 언급하는 것은 앗수르가 누리는 영화가 바벨탑과 같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영화를 꿈꾸는 세상 현실의 허상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내용만 보면 앗수르는 말 그대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큰 나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의 모든 나무가 시기할 정도라면 앗수르는 천국과 같은 살기 좋은 나라로 상상될 것입니다. 이러한 앗수르가 세상이 원하고 꿈꾸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나라에 살고 싶어 합니다. 현재보다 더 나은 나라,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나라를 원하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영화, 아름다움은 이미 멸망한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신기루처럼 있는 것 같지만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앗수르와 같은 나라도 멸망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누렸던 영화에만 마음을 둡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나라도 저런 나라였으면’하는 환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크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뻗어 나갔고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5,6절)는 내용만 봐도 앗수르와 같은 환경의 나라에 거주한다면 나 또한 모든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앗수르처럼 번영하고 강한 나라 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앗수르와 같은 강한 나라 되는 것이 잘못이라면 힘없는 약한 나라 되는 것은 옳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앗수르를 크고 영화롭고 아름다운 나라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애굽의 바로 왕을 앗수르와 같은 영화를 누리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강한 나라이든 약한 나라이든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애굽과 앗수르와 같은 이방 나라가 영화를 누리게 하셨을까요? 반면에 이스라엘을 그들에 비해 약한 나라가 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같은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물론이고 세상만 보면서 다른 곳을 바라보지 못하는 신자라는 허울만 가진 사람들 역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자라 하면서도 자신보다 많이 가진 자들을 보면 부러움과 함께 시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이나 앗수르를 크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게 하신 것은 국가의 번영은 생명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다른 이방나라에 비해 약하게 하신 것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의 번영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의 번영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앗수르를 시기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동산 에덴의 나무는 이스라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산은 하나님이 계시는 동산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는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 할까요?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고 다만 자신들보다 크고 아름답고 영화로운 앗수르만 바라봤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시기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습니다.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아래 있다는 것이고, 그 관계는 결코 끊어짐이 없다는 뜻입니다. 언약은 인간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음을 생각하기 않았습니다. 때문에 비언약 아래 있는 애굽이나 앗수르의 번영을 부러워 한 것입니다.
언약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세상을 보기 전에 이것부터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약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면 현재의 형편이 어떻든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지금의 우리 역시 언약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세상만 보이고 말씀이 보여주는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꿈을 꾸고 환상만 가지는 것입니다.
단 4장에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 이야기가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꿈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번민하였으나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들을 불러 꿈을 해석하게 하였으나 누구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다니엘이 해석합니다.
단 4:10-12절의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는 이것이 꿈 내용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본문의 앗수르의 모습과 같습니다. 세상의 중심으로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으며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으로 다른 나라들까지 그 그늘에 깃들고자 할 정도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세상이 꿈꾸고 원하는 나라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 모두가 추구하는 꿈이 무엇인가를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해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단 4:13절을 보면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를 순찰자라고 합니다. 순찰자가 소리 질러 외치기를 나무를 베고 가지를 자르고 잎사귀를 떨고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을 그 아래에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가지에서 쫒아내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의 나무에 대한 다니엘의 꿈 해석은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단 4:22)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찰자에 대한 꿈 해석은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단 4:25)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크고 높은 세상의 중심이 된 느부갓네살도 결국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요? 느부갓네살의 꿈의 의미는 15절의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에서 짐승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리라”는 꿈 해석으로 드러납니다.
15절에 대한 다니엘의 꿈 해석은 이렇습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 4:26,27)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해도 그 힘으로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지 못하고 오직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야 느부갓네살의 나라가 견고할 것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해 권고하는 것은 다니엘의 해석을 받고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의 권고는 사람의 꿈과 환상을 깨뜨립니다.
세상이 앗수르와 같은 나라가 되고자 하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을 가진 높은 자리에서 자신의 뜻대로 자기를 위한 삶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참된 현실이며 그 현실을 깨닫는 것이 견고한 삶의 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은 애굽이나 앗수르가 누리는 번영과 영화만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들의 번영과 영화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고 이스라엘의 약함 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외적인 번영과 영화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관계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입니다.
세상이 앗수르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위치에 있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두로 왕처럼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나는 신이라’고 하면서 세상을 다스리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속성의 존재를 다니엘서에서는 짐승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의 수 육백육십육으로 표현합니다.
7은 하나님이 홀로 일하심으로 이루신 일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6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사람이 일하고 사람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고자 하는 세상의 속성을 담고 있는 숫자입니다. 따라서 앗수르 환상 속에서 앗수르와 같이 되기를 소망하며 힘을 높이고 숭배하는 세상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반드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멸망한 앗수르의 번영과 영화를 애굽에 비해 말씀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늘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특히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들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자 하는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큰 교회는 목사에게 곧 힘이 되고 그 힘은 교단과 목사의 세계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 것임을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앗수르는 분명 견고한 나라였습니다. 천국과 같은 살기 좋은 나라로 상상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미 멸망한 나라입니다. 앗수르는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여 마음이 교만했고 그로 인해 다른 나라에 찍혀 넘어졌습니다. 이러한 앗수르를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높음이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높음이든 낮음이든 하나님의 임의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보면 “이는 물 가에 있는 모든 나무는 키가 크다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그 꼭대기가 구름에 닿지 못하게 하며 또 물을 마시는 모든 나무가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 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교만으로 인해 지하, 즉 음부로 내려갑니다. 이것이 높음을 자랑하는 세상이 가는 길임을 안다면 신자는 세상만을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크고 높은 힘이 나의 그늘이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늘 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 그늘 아래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그 가지에 깃들이며 기쁨의 감사와 찬송이 있는 길을 바라보고 그 길로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말씀에 의해 앗수르 환상이 깨어지면서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힘없는 낮은 자리에 세우셨다 해도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견고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